책에 미친 시기
2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쓰는 방에는 2층침대가 놓여 있다.
동생이 1층, 나는 2층.
자매의 방이라고 핑크핑크하고 아기자기한 공주방은 아니다. 방에는 책상 하나, 커다란 책장하나, 2층침대가 벽의 3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노란 장판 바닥이 한평 남짓 보이는, 작은 방안에 가구를 욱여넣은 듯한 그런 방. 책장에는 전집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는데, 수완이 좋은 어머니가 공동구매를 진행하고 10+1 이렇게 전집 10세트를 팔고 +1이 내방 책꽂이에 꽂히게 된 거다.
책을 팔기 위해선 샘플처럼 들여놓은 책들을 열심히 읽는 모습도 연출을 해야 했기에 나는 집으로 들어오는 책들을 맹렬히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은 엄마의 자랑이었고 책을 들여주는 보람이 되었다. 또 책을 읽을 때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자잘한 심부름도 패스였고, 동생이 놀아달라고 보채도 엄마는 "언니 책 읽는데 방해하지 말아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세계명작, 위인전집, 전래동화,...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댔던 그 시절이 내게는 책에 미친, 푹 빠진 시기가 아니었을까?
동생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말썽쟁이 장난꾸러기 였고, 나는 조용한 새침데기였다.
동생은 자신의 감정을 몸짓과 튀는 행동으로 표현했다면 나는 점점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장녀라는 포지션이 의젓함을 강요받았다고 해야 할까? 강요는 없었지만 스스로 그래야만 했던 아이. 늘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책을 읽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활발하고 활동적인 동생은 늘 어른들에게 지적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조용한 나와 비교되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는 꾸중 듣는 동생을 보며 조용히 책을 읽는 행위에 더 치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게 내가 인정받는 방식이고 타인의 간섭과 개입을 피할 수 있는 책은 안전기지가 되어주었다.
참 오랜 시간 책과 상관없이 살아왔다. 20대에 결혼을 하고 30대엔 육아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40대를 바라보는 그즈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사는 삶에서 '나'로 살고 싶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끓었고, 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면접 때 "왜 이곳에 왔냐?"는 질문에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에서야 "나를 찾으러 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입학을 하고 학교에서는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온전한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참 좋았다. 자의로 타의로 책을 가까이해야만 했다. 물론 전공서적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활자를 읽는 그 행위는 여전히 나에게 편안함을 제공했고, 나만의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주인공일 때도 있고, 주변인물일 때도 있다.
과거의 내 모습 이기도 하고, 현재의 내 모습 이기도 하다.
발견되는 내 모습을 보며 마음에 드는 부분도 발견되지만,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모습일 때는 이제라도 알아차렸음을 안도한다. 물론 반복해서 실수할지도, 아니 실수가 아니라 당연하듯 그 모습이 배어 나오겠지만, 내가 알아차렸으니 재빨리 수습을 할 수 있겠지...
누군가가 그 모습을 지적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인정할 수 있을까?
나는 책 속에서 안전하게 나를 알아가고 점검한다.
원경에서 나를 볼 수 있는 장이 되어준다.
'미치다'는 공간적 거리나 수준, 또는 어떤 상태에 일정한 선에 닿다 라는 뜻의 우리말 동사입니다. 일상에서는 단순히 닿는다는 의미 외에도 정신이 나간 상태이거나 어떤 일에 몰두하는 극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합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책을 읽는 행위자체에 몰두하는 극한상태로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지금의 나는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해 가는 일정한 선에 닿았다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