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대책회의 '내가 사랑하는 작가(책'
고르고 고르고 골라도 고르지 못했다.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니면서 그중에 사랑이라는 표현을 할려니 망설여졌다. '사랑? 내 사랑마저 그랬던가?'라며 스스로 되짚어가며 '이 작가다? 이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된다. 내 사랑이 오롯하지 못하여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추억이라며 등장하는 지나간 사랑처럼 그들의 책이 떠오르기는 했다. 나를 고민하게 한 그들을 방바닥에 떨어뜨려 다시 담아 보고 싶은 심정이다. 담기지 못한 것들에게 동정조차 허용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나를 위한 연민처럼 버리지 못하리라.
'수평선 물길 가르쳐주는 바다 갈매기와 함께'라는 가사가 어린 나를, 아직도 나를, 세상밖으로 불러내 주길 바라는 건지. 나는 아직도 '태양소년 에스테반'을 좋아한다. 누가 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보다 더 자주 내 목구멍 속에서 소용돌이치듯 맴돌고 있다. 그때의 그런 만화 같이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찾아가는 모험을 해 보고 싶은 아이가 아직 있는 것이다.
다른 성에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이었을 무렵의 만화영화와 사랑을 느낄 때쯤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 '다르게 생각하자.'라는 번호가 매겨진 개미에게로 옮겨갔다. 아직도 나는 무엇을 보든 '다르게 생각하자.'라는 이 말을 한번 되새긴다. 다르게 보자. 다른 편에서 다른 각도에서 다른 생각을 해보자.
이 시기가 지나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없는 나의 첫사랑이 찾아왔을 무렵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붙잡고 싶기만 했던 나의 순수함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 지독한 어둠이 드리운 날들의 연속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는 아직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는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지만 우연을 가장하며 새로운 사랑이 나타날 때쯤 레이코를 찾고 있는 것이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라'라고 듣고 싶어서 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내 청춘은 아직이고 싶지만 나는 이제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고 누군가 그어 놓은 선을 넘었을 나이에 찾아온 이 책을 좋아한다. '알은 세계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라고 헤르만헤세가 [데미안]에서 썼다. 가려진 창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인생 2막을 열고 싶어졌다. 나는 이제 알을 깨고 나와 날기 위해 여물지 않은 날개를 들썩인다. 곧 날아오를 것만 같은 상상을 하며 계속 들썩이고 있다. [싯다르타]를 읽고 '도대체 깨달음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읽고 듣고 반복해 봐도 모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질 때쯤 [싯다르타]의 글을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으면 그저 맘이 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온갖 잡생각이 들어와서 나가지 않을 때 나는 천천히 걷고 듣는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듣는 것이다. 깨달은 건 아직 없지만 잡생각은 비울 수 있으니 헤르만헤세의 글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또 한 명 나를 되돌아보게 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에서 요조가 '인간을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며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술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다만, 나를 잠시 속여주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나에게 해 준 말이다. 나는 요조였다. 분명히 다자이 오사무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를 보고 요조를 탄생시켰을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거짓 없이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요조가 환생했다고 믿는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인간실격의 요조들이 수두룩 빽빽하니 말이다.
지난겨울에 시작되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다시 루쉰의 [아Q정전]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 소년이 아니었다. 아 Q였다.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자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를 깨우려 했고 '의식 없는 민족은 영원히 종속된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했다. 나는 아직 소년이 온다를 다 쓰지 못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다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129일째 쓰고 있다. 왜 쓰는지 잊었고 왜 써야 하는지 잊었지만 다시 쓰기로 했다. 쓰다 보면 생각나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보는 것이다. '나도 혁명군이다.'라고 외치는 아Q는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두 명의 작가도 나는 사랑하는 중이다.
글이랍시고 쓰긴 써야 할 것 같아 앉아서 쥐어짜고 있긴 한데 도통 풀리지 않는다. 그저 왜 이걸 써야 하는지 감을 못 잡는 듯하다. '내가 사랑한 작가'따위는 없는 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책을 읽었다면 사랑한 건가? 싯다르타와 데미안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면 헤르만 헤세를 사랑한 건가? 아Q정전을 읽고 루쉰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사랑한 건가? 단 한 번 읽었던 '인간실격'을 읽고 떠오르다 못해 눈만 감으면 검은 도화지에 나타나는 요조와 요조의 말투까지 들린다면 다자이 오사무를 사랑하는 건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 게 사랑이다.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가 없어지면 사랑이 변한다고 말해야 하나? 사랑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상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내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첫사랑처럼 다가온 첫 책. 첫 작가. 첫 문장들을 잊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다.
바뀌는 사랑처럼 작가도 책도 바뀌었다. 사랑이 왜 변하니?라고 물어도 소용없다.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상대가 바뀐 것이다. 내가 사랑한 문장도 책도 기억도 사람도 작가도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양다리는 없다. '나는 한놈만 팬다.'라는 영화 대사처럼 나는 한 사람만 사랑한다. 한 작가만 사랑한다. 지금은 당신이다. 루쉰. 하지만 잊지 못할 아픈 사랑 같은 한강에게 술 마시고 '뭐 해?'라고 늦은 밤 문자를 보내는 찌질함이 아직 남아있다.
난 아직 잊지 못한다. 아직 읽지 못한 문장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