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앞에 서서...

1. 플롯과 구조

by Jin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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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어느 집 대문 아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이 문장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모모는 충격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나와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답답할 만큼 더디다. 피하고 싶을수록, 기다릴수록 시간은 오히려 느려진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시간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연말이라 마무리해야 할 서류들이 쌓여있었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며 일터에서 나의 스케줄도 크게 바뀌었다. 기숙사에서 돌아온 막둥이가 집에 머무는 동안 끼니를 챙기는 일도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해야 할 일들이 누적되었다. 내 일정을 정리하고, 아이의 시간을 챙기다 보면 워킹맘의 하루는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 하는데’ 마음만 분주했을 뿐, 실제로 해낸 일은 많지 않았다. 멀티플레이에 능하지 않은 나는 해야 할 일이 늘어날수록 더 어수선해지고,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붙잡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곤 한다. 그렇게 2025년에 읽기 시작한 책을 2026년이 되어서야 완독 했다.


이런 나의 상태 때문이었을까.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에 대한 표현들이 유독 깊게 와닿았다. ‘자기 앞의 생’은 삶과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어왔던 시간이 사실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 모모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그로 인해 그는 사회적 기록과 제도 밖에 놓인 존재가 된다. 사람들 속에 있으나 제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삶. 반면 로자 아줌마는 늙고 병든 몸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낸다. 이 대비는 시간의 흐름이 생물학적·물리적으로는 동일해 보일지라도, 사회적 조건과 관계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체감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정해진 시간 안에서 허둥대며 살아가는 나 자신의 생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 앞의 생]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축적하는 과정으로 의미를 갖는다. 로자 아줌마의 삶은 고통과 상처로 얼룩져 있지만, 모모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저 생존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존엄을 쌓아가는 시간이 된다.

모모 역시 어른들의 세계에서 방치된 아이이지만, 로자 아줌마와의 시간 속에서 사랑과 책임, 그리고 상실을 배운다. 이처럼 시간은 나이를 늘리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과 삶의 관계는 더욱 또렷해진다. 죽음을 앞둔 로자 아줌마에게 남은 시간은 짧지만, 그 시간은 어느 때보다 밀도 있게 그려진다. 모모가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는 선택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라는 막연한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삶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삶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관계와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르지만, 그 시간을 사랑과 책임이 있는 관계로 채울 때 비로소 삶이 된다. 모모가 바라보는 ‘자기 앞의 생’은 불확실하고 두렵지만, 동시에 타인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자기 앞의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내 앞에 놓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만의 행복과 기쁨을 발견해 가는 것이라고. 삶 속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사랑과 책임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그런 생을 살아냈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잘 살다 간다.’는 조용한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시간 앞에 앉아 있던 모모처럼, 나 역시 오늘도 나의 시간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어떤 삶을 채워갈 것인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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