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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80cm처럼 살아보기

by 미르

키가 작다는 것은 저번 키즈 잠옷 이야기에서 다 들통이 나 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 아이도 좀 아쉬운 키를 가졌다.


셋이 고만고만하게 나란히 같이 나갈라치면 작은 어떤 동물들 가족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언급을 안 하기로 한다. 보기에는 오종종하니 재미있겠지만 좀 슬프다.


남편과 나 둘 다 키가 작다 보니 아이가 태어났을 때 키 키우기에 노력을 했다. 각종 책을 보고 키 키우기에 좋다는 운동을 시키고 한약도 해 먹였다.

철마다 단골 한의원에 가서 그 귀하다는 사슴뿔을 해다 먹였다.

( 한의원집 아들이 딸이랑 또래였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한의사였는데 나중에 보니 아들내미도 고만고만했다. 이때 사슴뿔의 효과에 살짝 회의감이 들었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백화점 체조 교실, 유아 발레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래층 잘생긴 오빠를 따라 태권도장을 장장 7년이나 다녔다.


물론 운동에 젬병인 아빠 엄마를 닮아 품띠 딸 때 순조롭게 따지는 않았다.

30명쯤 가서 시험 치면 한 명쯤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한 명이 바로 우리 딸이었다.


막 학교에 들어가서 겪은 아이의 최초의 불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드라마에 흔히 그러듯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딱 드러눕고만 싶었다. 하지만 자신도 이게 뭔가 싶어 혼란스러워고 미안해하고 기가 죽은 아이를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다음에 다시 도전하자!"


영차영차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 말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었다. 한 번 면역 주사를 세게 맞고 나니 그 덕분에 다음에 떨어져도 그럴 수 있지 하는 강한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아, 2품 딸 때도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에 합격했다.)


학교 다닐 때도 체육시간이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키는 고만고만하다.

재미있으면 되었다.


이렇게 가족들 모두 높은 쪽의 공기를 맡지 못하고 살지만 가끔씩 '키 180cm 기분 느끼기' 체험을 한다.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딸아이의 초등 고학년 정도이지 않나 싶다. 책장 정리를 하다가 책을 바닥에 몇 권 쌓아 놓았을 때였다. 높이가 한 20cm쯤 되는 안정적인 큰 책 더미에 무심코 올라가 보았다.


웃음이 났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이 가지는 시선이란 근사했다.


친구의 아들은 초등학생 때 쑥쑥 자라다가 어느 날 아침 엄마에게 놀라서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냉장고 위가 보여요!"


냉장고 위를 내려다보는 키라니!

많이 부럽다.


책 덕분에 키 180cm를 느낀 김에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비슷한 키의 사람들이랑 안는 것과는 또 다른 폭 안는 좋은 느낌이 있었다.

너무 좋아서 서로 돌아가면서 책 위에 올라가서 안고 안기기를 계속했다. 안길 때도 폭신하게 안기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 뒤 가끔씩 책장 정리를 하거나 생각나면 두꺼운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키 180 체험을 한다.


두껍고 단단한 책!

집에 찾아보면 몇 권씩 보인다.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하게 하는 남편의 무슨무슨 공학이 붙은 책들이 두께가 상당하다. 컴퓨터 관련 책들도 아주 두껍고 멋지다. 영어 토익책들도 두께가 만만치가 않다.


오늘도 생각난 김에 몇 권 꺼내 쌓아 놓고 서로 안고 안기기를 한바탕 해보았다.

바로 웃음이 나고 즉각적으로 즐거운 마음이 든다.


시간이 많으시고 책장에 쌓아놓은 책들이 좀 있다 하시는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혹시 집에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들이 있으신지?

부럽다.

복 받으셨구나!

바로 달려가서 한번 안아 달라고 해 보시라.

참 느낌이 좋다.


잠깐, 그러면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들은 안기는 기분을 어떻게 느끼나?

책을 40cm나 되게 쌓는 것은 위험하다.

어디 밖에 나가서 높다란 안정적인 바위나 받침대가 보이면 한번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물론 예쁜 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 한번 안아 볼까?"

"나, 한번 안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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