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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요정

우리 집에는 요정이 산다

by 미르

요정을 세는 단위가 '마리'인지 '명'인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날개 달린 날아다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는 '마리'라 하고 소설 해리 포터에 나오는 집요정 도비에게 ‘마리’를 쓸지 ‘명’을 쓸지 헷갈리지만 일단 ‘마리’로 불러보자.


우리 집에는 요정이 몇 마리 있다. 기특하게도 내가 아주 바쁠 때 휙 나타나서 일을 해결해 주고 간다.


이십 년도 훨씬 전에 처음 나타난 것은 '설거지 요정'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 유치원에 보내고 운동을 다닐 때였다. 유치원 보내고 나서 한정된 시간에 집안일을 하고 운동시간에 맞춰 나가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당시 운동하던 엄마들 사이에는 설거지파, 침실파, 거실파, 욕실파 등 다양한 '파'가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것은 미루더라도 설거지는 해야 한다 파'였다. 당연히 설거지가 우선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주장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이불정리를 생각하면 ‘침실파’가 제일 나은 선택이었을까?

지금 선택하라고 하면 설거지거리는 식기체척기에 맡기고 이불정리를 해야겠다.


아무튼 그날도 정신없이 바쁜 아침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부엌으로 왔는데 곧 어리둥절해졌다. 부엌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요정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오후에 이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그 후로는 오후에도 티가 확실히 나는 설거지 요정이 가끔씩 나타났다.

그럴 때면 딸아이는 호들갑을 떨며 나를 부른다.


"엄마, 요정이야. 요정이 다녀갔어!"

둘이서 손을 맞잡고 요정칭찬을 한바탕 해준다.


그 뒤 시간이 지나고 식기세척기가 생기면서 설거지 요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계화로 인해 설거지 요정도 일자리를 잃었다.

설거지 요정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지만 그 뒤로 가끔씩 ‘빨래 널기의 요정’이나 ‘양말 개기의 요정’이 나타날 때가 있었다. 이 요정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일상적인 반복적인 일을 할 때 나타났다.


그런데 요즘은 '글쓰기 요정'이 나타난다.

‘설거지 요정’에 비하면 완전 업그레이드 된 요정이다.


예전에 들었던 수호천사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수호천사가 한 명 있다. 그런데 인간이 노력하고 단계가 높아지면 수호천사도 높은 등급으로 교체된다. 더욱더 강력한 수호의 힘을 펼쳐 준단다. 요정들도 등급이 있으려나?


‘글쓰기 요정’님은 하루에 하나씩 글감을 던져 준다.

그러면 넙죽 받아서 제목을 얼른 저장해 놓고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글을 쓴다. 언제 줄지 몰라서 머리에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알아차릴 수가 있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주는 것인지 무의식에 있는 글쓰기인지 그동안 읽고 읽어낸 지식이 지혜가 되어 나타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글쓰기 요정’님께 감사하기로 했다.


글쓰기 요정님,

오늘도 글쓰기를 잘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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