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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장산 억새밭

정상이 아니라 중간에서 행복 찾기

by 미르

억새가 한창이라는 요즘.

황금색이 도는 은빛으로 하늘하늘거리는 억새가 보고 싶어졌다.


집 근처의 장산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온갖 등산 장비와 등산 스틱을 갖추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치원생들도 뛰어 올라간다는 평이 있는 야트막한 등산로 끝에 놀랍게도 작은 억새밭이 있다.


작년 이맘때쯤 장산에 헉헉거리며 갔다가 정상까지는 못 가고 중간의 생각지도 못한 억새밭만 보고 돌아왔다. 뜻밖의 기분 좋은 수확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달리기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다시 올라가 볼 만하다. 용기를 낸다.


아침을 먹고 남편과 둘이 집을 나서 신해운대역에 도착해 장산공원으로 들어섰다. 시원스레 쭉 뻗은 길을 따라가다 용이 올라가고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했다는 작은 연못을 보았다.



동화 속의 선녀 목욕탕이 이곳에도 있었다. 전국에 선녀들이 찜해 놓은 목욕탕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이곳저곳 목욕탕을 찾아 내려오는 선녀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영금지의 빨간 표지판이 선녀들을 위한 수질 관리 시간인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등산로의 초입 부분.

억새밭까지의 거리는 2.2km.

평지의 거리와 산에서의 거리 감각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작은 숫자에 마음이 가뿐해진다.

그래 가 보자.

억새야, 기다려라.


마음은 가벼웠는데 점차 오르다 보니 발이 무거워졌다. 완만하지만 그래도 경사인 이 길을 산악자전거로 내려오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아, 저 사람은 올라올 때는 튼튼한 다리를 믿고 내려갈 때는 목숨을 걸고 내려가는구나!


한동안 올라왔다 싶은 곳에서 킬로수는 적혀 있지 않고 그림으로 되어 있는 표지판에서 얼마쯤 가야 억새밭이 나오는지 찾아보았다. 길을 올라오던 아가씨 두 명도 억새밭을 찾고 있다. 네 명이 열심히 현재 위치와 억새밭 위치를 가늠하고 반쯤 왔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가씨들은 파이팅을 외치고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듯이 앞서 나간다.

0.9 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와서 앉아 쉬거라 유혹하는 정자도 보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억새!

계속 간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남편과 주고받던 이야기도 끊기고 땅에 친절하게 깔린 폭신한 야자 매트의 꼬임을 열심히 바라보고 간다. 너무 힘들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아, 달리기와 산에 오르기는 또 다른 영역의 일이구나!


확연히 느려진 발걸음에 남편은 저 앞으로 홀로 나아간다.

배신자!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고개를 뒤로 돌려 한 번씩 확인은 한다.

고개를 돌리다 내 옆을 막 지나쳐간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키 큰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외국인 입에서 흘러나온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사말에 남편도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외국사람을 만나고 대화(?)까지 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내 옆으로 다가와 마음을 진정시킨다.

영어도 아니고 우리나라 말로 인사 한마디하고는 아주 기고만장이다.


표지판이 나타나고 0.6km 남았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돌덩이와 흙이 보이는 전형적인 산길이 나타난다.


소원을 비는 돌탑도 있다.

소원!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소원을 비는 포인트에서는 무조건 소원을 빈다. 다다익선. 많이 빌면 많이 빌수록 좋다. 달님에게 무지개에게 돌탑에게도 빌어 놓아야 이루어질 가능성도 많지 않을까? 나의 소원을 빌어야 한다.


소원의 돌을 찾는다.

돌탑 가까이의 돌들이 다 동이 났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빌어 주느라 돌들이 아주 바빴겠다.


돌탑에서 꽤 떨어진 곳에까지 가서 적당한 돌을 하나 겨우 찾았다.

지금 꼭대기 위에 있는 돌보다는 좀 작아서 안정적이고 다른 이의 다음 소원도 올릴 수 있는 평평한 마음을 가진, 마음씨가 너그러운 돌이다.



저의 소원을 시간 나면 부디 들어주세요.



소원의 돌탑을 지나 드디어 억새밭이 펼쳐진다.

이리 찍어라 저리 찍어라 다리가 길게 나와라 온갖 주문을 하고 한바탕 사진을 찍는다.

말 한 마리 아니 작은 나귀 한 마리 있으면 타고 걸어가고 싶은 억새밭 길을 걸어가면서 내 마음속의 영화를 찍어 본다.



억새밭 옆의 벤치와 커다란 평상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먹는다.

자연주의 오이파와 자연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컵라면파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달달한 과일파.


밖에서 칼 쓰는 것은 귀찮으니 출발 전에 남편이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서 깎은 단감을 먹는다.

사과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사과라기보다는 커다란 대추 같은 사과대추를 먹고 새끼손톱만 한 씨앗을 슬쩍 땅에 뿌려본다.


내년에 이곳에서 사과대추나무가 자랄까?

아마 이런 식이라면 산등성이마다 등산객이 먹고 버린 씨앗에서 자란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자랐을 것이리라.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아쉬운 짧은 억새밭 길을 다시 한번 더 걷고 산을 내려온다.


하산할 때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집에 도착하니 완연한 가을비가 되었다.

오늘 정상은 아니고 정상 근처의 억새밭에서 작은 행복을 보고 왔다.

과연 멋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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