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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봉오리 필 무렵

거제도 공고지의 겨울을 보다

by 미르

길을 가다가 동백나무에 꽃봉오리가 콩알만 하게 수도 없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벌써 동백꽃이 피어날 시기인가?


동백꽃은 겨울에 볼 수 있는 꽃인데 벌써 피기 시작하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지만 내 마음은 벌써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 흐드러진 한 섬으로 나를 훌쩍 데려가고 있었다.


공고지.

거제라는 섬에 있는 곳.

섬이기는 하지만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차를 타고 쭉 들어가면 되니 배를 따로 타지 않아도 된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지심도도 있다.

예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환상적인 촬영지로 이름난 곳인데 이곳은 배로 갈 수 있다. 배를 타고 가면 새우깡을 노리고 모여드는 수십, 수백 마리의 갈매기를 볼 수 있어서 좋다.


지심도와 달리 거제도는 규모가 상당하다. 한동안 유명한 장소를 다니다 새로운 곳에 그냥 내키는 대로 가본다. 생각지도 않은 여행지에서 특별함을 만나는 것은 보물 찾기에 성공한 느낌이다.


어쩌다 들린 거제도의 한 식당 테이블 위에서 거제에서 가볼 만한 곳이 적혀 있는 손바닥만 한 안내 책자를 보았다. 거의 다 가본 곳인데 공고지가 눈에 들어온다.


꽃이 많단다.

별 기대 없이 밥을 먹고 달려갔다.

때는 한겨울.

1월이나 2월쯤의 일이었다.

빨간 야상 패딩과 아이보리색 바지, 갈색 패딩 부츠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닐 때였다.


공고지.

지금은 봄의 수선화로 이름난 관광지가 되어 언제 방문해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하지만 20년 전쯤 내가 본 공고지의 초입 바닷가에는 한산하고 스산한 겨울바람만 불고 있었다.


시에서 지정된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한 할아버지가 평생을 다해 가꾼 곳.


작은 언덕 같은 산을 하나 올라갔다.

꽃밭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등산인데?

패딩 부츠가 아니라 등산화를 신고 와야 하는 곳인가?

그냥 산이다.


그런데,

작은 언덕 같은 산 위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는 그 좁은 돌계단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가파르고 친절하지 않은 돌계단 양쪽으로 줄지어 서있는 동백나무들이 지나가는 길의 위쪽까지 가지를 뻗어 온통 작은 동백꽃 터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신비롭고 차가운 겨울 요정의 반짝이는 나라로 가는 길을 쭉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올라온 만큼이나 긴 그러나 느낌상 길지 않은 길을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갔다. 반듯하지 않은 불규칙한 돌계단이니 자연히 조심할 수밖에 없다.


바닥에는 송이째 뚝뚝 떨어진 동백꽃 천지.

누군가가 떨어진 꽃들을 한데 모아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하트.


바닥에는 점점이 붉은 꽃이 깔려 있고 머리 위에도 역시나 붉은 동백꽃이 가득 한 좁은 터널을 내려갔다.


그 끝에는 수선화 밭이 있었다.

아쉽게도 동백과 수선화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한 겨울에 가면 노란 흐드러진 수선화는 볼 수가 없다.

수선화가 피는 봄쯤이면 붉디붉은 동백꽃은 이미 뚝뚝 다 떨어져 버리고 만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그 뒤 몇 번의 방문으로 노란 수선화도 보고 또다시 붉은 동백꽃도 보았지만 나의 선택은 동백꽃이다.


강렬한 첫사랑의 기억이 평생 가듯이 신비로웠던 동백꽃 터널의 기억은 인상적으로 다가와 이렇게 길가에서 얼핏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작은 꽃봉오리 하나를 보고도 그 신비로운 터널로 데려다준다.


그리고 이 글을 쓰다 알았다.

몇 번의 방문이 다 이렇게 환상적이지는 않았다.


가는 길이 좁아 눈앞에 뻔히 보이는 한 3분 거리의 길을 30분이 넘게 차 안에서 답답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작고 푸른 동백꽃봉오리를 보고 신비로웠던 그 순간을 먼저 기쁘게 생각해 냈다.


살다 보면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다 존재한다.

그중 좋은 기억을 먼저 떠올리고 기뻐하다니!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예전에 레이첼 맥아담스와 채닝 테이텀이 나온 영화 <서약>을 보았다.

레이첼 맥아담스는 영화'어바웃 타임'의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인상 깊게 보았다.

채닝 테이텀은 킹스맨 등 굵직굵직한 영화에 많이 출연하는 한 덩치 하는 남자 배우이지만 의외로 달달한 로맨스 영화에도 참 잘 어울린다.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와서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부잣집 여자랑 가난한 남자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여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혼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남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 여자는 다시 예전처럼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한다.

영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작은 에피소드 중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여주인공의 친한 친구와 한때 바람이 났다.

여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상태라 이 사실을 모르고 친구를 만나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집으로 와 엄마에게 화를 내며 물어본다.


왜 아버지를 용서했는지

왜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았는지.


그러자 엄마는 말한다.


'나쁜 기억이다.

하지만 너의 아빠랑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다 나쁘지는 않았다.

너를 낳고 이렇게 좋은 기억도 많았다.

이런 기억들을 다 버릴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의 말을 한다.

나쁜 기억도 있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사는 것.

이렇게 사는 법도 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억으로 오늘 하루를 잘 보냈으면 한다.

혹시라도 좋은 기억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 만들면 되지 않을까?




아직 연두색인 작은 꽃봉오리 사진이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으로 겨울을 먼저 느끼는 것일까?

하여튼 이 작은 녀석덕분에 글이 멋지게 쓰여서 감사한 마음이다.




이 글의 제목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생각하고 지었다.

흔한 로맨스 드라마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스릴과 공포가 적당히 잘 섞인 사랑하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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