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여름이 지나고 나뭇잎들은 하나둘씩 색이 바래 떨어지고 옷 가게 매장은 가을 옷으로 변신한다.
장을 보러 간 대형마트 옷 코너를 지나치다가 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체크 잠옷을 보았다. 분명 초록색인데 왠지 크리스마스가 생각나는 포근함이다!
옷을 선택할 때 디자인보다 색이 먼저 더 끌릴 때가 있다.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다가 크리스마스가 연상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떠오르는 영화 '나 홀로 집에'의 주인공 케빈이 바로 생각이 났다. 영화 속의 케빈이 입었던 빨간 체크 무늬 잠옷은 아니지만 초록과 남자아이의 잠옷과 이어져 크리스마스가 생각이 났다.
그렇다. 남자아이의 잠옷이다.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XXXL'이라는 사이즈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어른들 옷도 아니고 아이들 옷인데 XXXL이라니!
옷을 만드는 회사마다 표기법이 다르니 아이의 가장 큰 옷에 이런 무지막지한 X를 표시했구나. 자세히 살펴보니 키즈, 남아, 160이다. 12~13세의 키 160cm가 되는 남자아이를 위한 옷이라고 친절하게 적혀 있다.
어라? 내 키보다 큰데?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나의 키는 160cm에 미치지 못한다. 원래도 160cm가 안되는 작은 키가 어찌 된 일인지 2년마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성실하게 줄어들어 참 안타까운 키다.
만져보니 재질도 편안한 면에 가격도 어른 잠옷보다 쬐끔 저렴하다.
아, 한 번 사 볼까?
마음 속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다시 살펴보지만 꽁꽁 잘 포장되어 있는 상품만 보이고 샘플 옷이 없다.
옷을 하나 가지고 저쪽에서 옷을 개며 관리를 하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물어 봐야겠다.
"저기, 아이 잠옷 큰 건데 제가 입어도 사이즈가 맞을까요?"
"일단 사 가고 안 맞으면 환불하면 됩니다!"
경쾌한 답이 돌아온다.
오호,환불!
요즘은 환불 제도가 잘 되어 있지만 그래도 계산하고 다시 환불하고 그 절차가 번거롭기는 하다.
한 번 더 고민을 하다 한 번 사보기로 했다.
계산을 하고 나와 포장지를 뜯어 눈대중으로 대강 확인을 했다. 줄어드는 키와 함께 점차 굵어져 가는 튼튼한 몸통을 이 잠옷이 품어 줄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몸통 품을 보니 대강 맞을 듯하다.
집에 후다닥 와서 장본 것은 고대로 싱크대에 올려놓고 잠옷을 입어 보았다.
성공이다!
사이즈가 딱 맞다.
심지어 성인 여자 잠옷 바지는 좀 긴 것도 있지만 이 남자아이 잠옷은 길이도 딱 맞다.
옷이 맞아서 기분이 좋긴 한데 키즈 잠옷 사이즈가 맞다고 이걸 좋아라하는 게 맞는지 약간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이렇게 성공적인 잠옷 쇼핑을 하나 끝냈다.
이제 잠옷 선택의 폭이 늘어났구나.
나의 또 다른 선택.
키즈, 남아, 160!
아,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잠옷 바지 중 끈으로 앞을 묶는 스타일은 좋다. '내가 앞이다!' 자신 있게 외치는 앞부분을 보고 옷을 입으면 된다. 끈이 없는 잠옷 바지는 입을 때 주의 깊게 이게 앞인지 뒤인지 열심히 살펴보고 입어야 한다.
귀찮다.
귀찮아서 귀찮은 바느질을 해야겠다.
여러 번 귀찮은 것보다 한 번 귀찮은 것이 훨씬 낫다.
바느질 함에서 초록, 파랑과 어울리는 초록색 얇은 리본 끈을 찾아 예쁜 리본으로 매듭을 지어 잠옷 바지의 앞쪽에 똭 달아준다.
'이제부터 내가 앞이다!'
가느다란 리본이지만 이렇게나 존재감이 있다.
이번 가을 겨울은 크리스마스를 닮은 초록 파랑 잠옷과 포근한 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