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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이 필요한 계절

무릎담요의 또 다른 이름은 껍질

by 미르

"내 껍질, 내 껍질이 어디 있지?"

아침부터 딸이 껍질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무릎담요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지만 딸은 '껍질'이라는 이름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면 무릎담요를 찾는다.

껍질은 말 그대로 몸의 껍질처럼 착 붙어 떨어지지 않는, 추운 계절을 지내는 딸의 필수품이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추운 교실에서 공부하는 딸을 위해 사 준 담요를 아기들 애착 담요처럼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인데도 가을이 되면 찾고 있다.

원래의 용도는 무릎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지만 슈퍼맨처럼 어깨에 두르고 다녀 단추를 달아 주었다.


예전 '반지의 제왕'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프로도와 일행이 절대 반지를 위한 여정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하고 도중에 요정의 왕국에 머물게 된다. 요정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고 멋진 망토까지 선물 받게 된다.


나무줄기를 더 닮은 듯한 진한 초록색의 망토에 황금색의 멋들어진 브로치가 달려 있어 긴 여정에 손을 자유롭게 쓰며 험한 추위를 막아 주는 망토가 멋져 보였다.

일행은 브로치로 여민 망토를 입고 힘을 내서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런데 적당한 브로치가 없다.

바느질함을 뒤져 화려한 브로치는 아니지만 동그란 단추를 달고 실을 세 갈래로 나누어 아이 머리 땋듯이 단단하게 만들어 단추 고리를 만들었다.



위의 사진은 아이 방의 인형 한 마리를 데려와서 찍었다.

처음에는 미니언즈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목이 없는 녀석인지라 사이즈가 너무 커서 맞지 않았다.

두 번째로 데려온 하마 녀석이 그나마 목이 좀 맞았다.

웃고 있는 하마에 홀려서 하마에게만 시선이 가겠지만 하마 말고 하마 목 아래에 있는 정교한 단추고리와 단추를 봐주시기를!


이렇게 가을이 오면 딸은 집에서 길 떠나는 프로도처럼 목에다 망토를 두르고 다닌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의 껍질도 있다.


아직 나의 계절은 여름이라 반팔이지만 곧 나도 옷장 속 어디에선가 나의 껍질을 찾아야 한다.


몇 해나 전에 산 플리스 점퍼이다.

주황색 꽃무늬가 예뻐서 샀는데 어찌 사고 나니 연륜이 느껴지는 옷이라 밖에 다닐 때는 못 입고 집에서 입기 시작했는데 웬걸 아주 딱이다.


주방에서 많은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빨간 양념의 위대함을 잘 알 것이다.

일단 빨간색 양념이 묻었다 그러면 되돌리기 아주 힘들어진다.

바로 주방 세제를 묻히고 빡빡 세게 공들여 빨아야 겨우 빨간색 양념이 지워진다.


그런데 이 주황색 플리스 점퍼는 요리를 하다가 어쩌다 빨간 양념이 묻어도 화려한 꽃에 파묻혀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

시골 할머니들 일바지의 화려한 무늬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리고 세탁도 아주 쉽다.

세제와 물만 닿으면 바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음도 어찌나 넉넉한지!


옷을 입고 난 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를 동안 (나의 배가) 무럭무럭 자라서 다른 옷들 (특히 청바지들)이 나에게 퇴짜를 놓는데 이 마음씨 좋은 주황색 점퍼는 이런 나를 내치지 않고 나(나의 배)를 딱 알맞게 포근하게 품어 준다.


딱 맞아서 제2의 피부 같기도 하고 더욱더 껍질스럽다.


아주 오래 입어서 사실 다른 옷을 장만했는데 아직 정이 들지 않아 이 주황색 껍질을 버리지 못하고 찬 바람이 불면 습관적으로 이 옷을 다시 꺼낸다.


아, 내일쯤이면 이제 슬슬 나의 껍질도 꺼내야 될 듯하다.


차가운 공기가 몰려오고 있다.

이제 주황색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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