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지금 꽃을 사면 장 볼 때 거추장스러우니 장을 어서 보고 꽃을 사러 가기로 하자. 꽃수레가 장 볼 동안 떠나면 안 되는데 싶은 마음에 필요한 것만 후다닥 장을 보고 꽃을 보러 갔다.
단돈 5,000원!
한 다발씩 투명한 셀로판지에 쌓여 빽빽이 꽃들이 모여 있었다. 가을이라 그런지 국화를 닮은 꽃들이 많았고 각각의 이름은 있으되 내가 모르는 이름들을 가진 많은 꽃들 사이에서 잠깐 어지러운 방황을 한다.
다채롭고 찬란한 빛들을 뿜어 대며 나를 사 가라는 꽃들 사이에서 다홍을 품은 분홍색 장미에게 눈길이 끌린다. 자세히 장미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 싶지만 옆에서 이 꽃 저 꽃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꽃수레 사장님이 힘드시니 재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화려한 포장?
없다.
흔한 리본?
없다.
그저 셀로판지에 쌓인 한 다발을 쓱 꺼내어 물이 흐르지 않게 줄기 부분을 비닐봉지에 담아 주는 것이 끝이다. 고맙게 받아 들고 길을 향한다.
꽃을 사고 나니 바로 옆의 로또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5,000원.
딱 로또 한 장 값이다.
예전 무슨 일인지 카드 지갑에 천 원짜리가 4개 남았다. 카드만 쓰다 보니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길 가다 붕어빵을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만 원이나 이만 원 정도를 카드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날도 어쩌다 보니 4천 원이 남았는데 딱 떨어지는 만 원, 이만 원이 아니라 써 버리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로또 가게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4천 원으로 살 수 있느냐는 말에 별다른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히 쓱 내미는 로또 용지를 집에 들고 왔다. 횡재를 기대하며 두근두근 며칠을 보낸 뒤 그 결과가 아직도 기억난다.
4천 원 용지 속에 찍혀 있는 총 24개의 숫자 중에 달랑 2개가 맞았다. 한 줄에 하나도 안 맞는 것이 2개나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온 가족이 한바탕 웃고 넘어갔다.
5천 원의 로또와 5천 원의 꽃!
오늘 즉각적인 행복을 위한 꽃을 선택했다. 꽃을 소중히 가슴에 미스코리아의 기다란 트로피를 들 듯 소중히 들고 오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꽃을 어디에서 샀냐고 물어본다. 마트 맞은편 로또 가게 옆에서 샀다고 정보를 알려 주고 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집에서 셀로판지를 풀고 유리 화병을 가져오고 꽃을 내키는 대로 잘라 꽂았다. 어쩌다 보니 욕심쟁이처럼 짙은 초록 이파리들이 많아져서 비좁아 보이긴 하지만 꽃이 예쁘니 그냥 두기로 했다.
꽃을 꽂고 그제야 꽃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쳐다본다. 보면 볼수록 우아한 얼굴도 있고 수줍은 연한 핑크에서 진한 핑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얼굴도 보인다. 그중 흥미로웠던 것은 꽃잎이 속에 한 100개쯤 와글와글 들어가 있는 장미꽃이었다. 스펀지 실험맨처럼 위아래 흰색의 실험복은 안 입었지만 실험맨처럼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내서 그 개수를 확인하고 싶었다.
5천 원으로
꽃의 얼굴을 보며
시인의 마음도 얻고
과학자의 마음도 얻었다.
오호, 오늘 횡재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처럼 통통하게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며칠 뒤 급한 마음에 장미꽃잎을 세어보았다. 과학자의 진지한 마음이 아니라 마녀의 마음으로 분해하기 시작한다.
아래위로 붙은 실험복?
없다.
집에서 입는 반팔, 반바지이다.
개수를 정확히 셀 수 있는 격자무늬의 정교한 종이?
없다.
방에 걸린 달력을 가져와서 하얀 뒷면을 이용하기로 한다.
화병에 꽂힌 장미들 중 가장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로 마녀의 희생물이 된 장미의 목만 잔인하게 가위로 자른다.
하나하나 떼어내다 성급하고 정교하지 못한 손놀림으로 30번째 꽃잎이 찢어진다. 아무 일이 없듯이 붙여 제자리에 둔다. 꽃잎이 점점 작아지고 작아지더니 마침내 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