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구하기
베란다에서 며칠째 무럭무럭 익어 가다 못해
길가의 은행잎처럼 노랗게 변한
파인애플을 가져왔다.
오늘의 미션은 파인애플 절임 만들기.
파인애플을 먹으면 혀가 따갑다.
평소에 파인애플을 먹으면
혀가 따갑다고 하는 딸아이에게
'허약한 것'이라 비웃었다.
지난주에 산 파인애플 한통을
다 먹어 가다가 알았다.
너도 따갑냐?
나도 따갑다.
아, 나도 허약하구나.
소고기 양념 재울 때 파인애플을 넣는다.
조금만 넣는다.
(소고기죽을 좋아하면 아주 많이 넣어도 된다.)
소고기를 더 부드럽고 맛있게 만들어 준다.
파인애플 속에 단백질을 녹이는 효소가 있다.
그래서 혀의 단백질도 녹인단다.
혓바닥이 말도 못 하게 따갑다.
이 맛있는 파인애플은 먹고 싶고
혀가 아픈 것은 싫어서
파인애플 절임을 만들어 먹기로 한다.
파인애플 자르기.
자유분방한 머리를 닮아서
잘못 만지면 큰일 날 것 같은
어수선한 잎사귀를 먼저 댕강 자른다.
흐르는 물에 파인애플을 씻고
칼로 껍질을 시원하게 잘라 낸다.
동그란 까만 씨들이
별들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오디오북에서 만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흔들림 없이 이태리 장인의 느낌으로
씨를 칼로 하나하나 도려내서
우리가 아는 노란 파인애플을 드디어 만난다.
과감하게 세로로 길게 4등분으로 잘라
중간의 나무토막 느낌의 굵은 심을 잘라낸다.
이제 칼질 들어간다.
파인애플 통조림에 들어 있는 크기 정도로
마구마구 잘라 준다.
설탕을 적당히 넣는다.
적당히.
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먹을 절임이니
잼보다는 훨씬 적게 '적당히' 설탕을 넣는다.
바닥이 두꺼운 냄비에 넣고
약한 불을 켜고
파인애플과 설탕이 잘 섞이도록
한번 휘리릭 저어 주고
타이머를 20분 정도 맞추고 관심을 끈다.
약한 불은 마음씨가 좋으니
관심을 약간 덜 가져도 된다.
잠시 뒤 온 집안에
달달한 파인애플의 향이 퍼진다.
파인애플에서 나온 즙이랑
설탕이 녹은 흥건한 물을
작은 그릇에 담아 간을 본다.
아, 애정이 살짝 지나쳤구나.
조금 달다.
괜찮다.
조금 단 것을 먹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좋다.
물이 많은 것 같아
급한 마음에 불을 확 올려
보글보글 끓여 준다.
수분을 좀 날려 주고
역시나 적당해 보일 때 불을 끈다.
이렇게 파인애플 절임이 완성되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다.
우리가 아는 통조림 속의 파인애플 맛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파인애플 볶음밥,
파인애플 스파게티,
파인애플 어쩌고 저쩌고
이름 붙은 온갖 음식들에
이 녀석들이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며
찬조 출연할 예정이다.
<하이 스쿨 뮤지컬>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중후한 분위기의 잭 에프론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바다를 닮고 지구를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시절의 그를 볼 수 있다.
미국 고등학생들의 달달한 뮤지컬 영화인데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자 악역이 눈에 뜨였다.
절세 미녀 김태희도 처음에는 악역으로 나왔다.
'천국의 계단'이라는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에서
아주 못된 부잣집 딸로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익혔다.
이 영화의 악역도
아주 못된 부잣집 딸로 나오는데
그리 밉지 않은 캐릭터이다.
<하이 스쿨 뮤지컬> 시리즈 2편에서
이 악역이 영화 중간에
'파인애플 공주'노래를 부른다.
남자 주인공 잭 에프론에게
같이 노래하자고 꼬시는 장면인데
부잣집 딸답게
각종 소품들로 화려한 무대에서
역시나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나와 노래한다.
나는 파인애플 공주
마법에 걸린 물고기를 보았네.
물고기 마법을 풀어 주었네.
아, 왕자가 되었구나.
대강 이런 분위기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를 지배하는 후렴구가
아주 인상적이다.
하와이처럼 들리는 말이 나오는 듯해
하와이말 같기도 하고
의미 없는 의성어 같기도 한 후렴구.
음은 둠칫 둠칫.
후무후무 누쿠누쿠 아푸아하
마카히키 말리히니 후
후무후무 누쿠누쿠 아푸아하 우~
하와나 와카와카 니키니키 푸푸푸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냥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글을 다 쓰고 난 뒤 이 의미 없는 후렴구 때문에 맞춤법 검사는 화가 아주 많이 났다.)
베란다에서 홀로 늙어 죽었을지도 모를 파인애플.
오늘 파인애플 구하기에 성공했다.
작은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