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스콜과 히말라야를 내 품에

김장하고 나면 수육보다 목욕

by 미르

김장이 끝났다.

나의 몸에 묻은 빨간 양념들을 털어낼 시간이다.

가자, 목욕탕이다.


김장의 일등공신 나의 조력자 오른팔 파트너

남편과 함께.

5명 아니고 1명.


그분은

김장날 아침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새우 탈출 못하게

잘 묶어 데려오고

맛집에 줄을 서서 맛있는 김밥을 사 오셨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을 먹으며

힘을 내서 김장을 할 수 있었다.


탁탁타타닥이 아닌 또각또각.

정확한 칼질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절임배추를 나르고

차곡차곡 채워 놓은 김치통을

번쩍번쩍 나르며

힘센 인간은 이런 것이다의 정신을

알게 해 주었다.


이 영광된 시간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자, 떠나자.


장소는 동래.

해운대에서 동래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날은 주말.

주말에 해운대 근처에서 차를 운전하면

5분이 30분이 되는 기적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목욕바구니가 아니라

명품관들 사이에 출입구가 떡 나있는

부산의 유명한 백화점 찜질방을

이용할 때처럼

멀쩡한 가방을 들고 가기로 한다.


지하철 온천장 역에 내려 잠시 걷는다.

온천장.

동네 이름.

역이름도 온천장역.

그야말로 역사 깊은 온천의 동네.


머나먼 옛날에

다리를 다친 학과 노루가 와서

온천물에 다리를 담그고

나은 다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백학 설화, 백록 설화가 있는 곳.


신라시대부터 시작해서

고려, 조선시대까지

왕과 귀족들이 행차해서

온천을 즐긴 곳.


목욕탕 입구에서

남편과 협상에 들어간다.


1시간 반.

어림도 없다.

온천인데 2시간.

!


키를 받고

신발을 벗는다.


목욕하고 나올 동안 신발이 심심하니

양말이랑 같이 사이좋게 놀라고

양말도 하나씩 운동화 안에 넣어서

신발장에 넣어 둔다.

(여분 양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젖은 양말이 싫다.)


웹툰의 배경이 되었다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목욕탕답게

끝없이 펼쳐진 듯한

기나긴 신발장을 지나고

역시나 기나긴 동굴 같은

사물함들을 지나쳐 간다.


후다닥.

마음이 급하다.

어서 탕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머리를 재빨리 감고

샤워를 마치고

샤워 타월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게 잘 감싸고

정수리에 커다란 리본을 만들어 묶는다.


어디에 제일 먼저 들어갈까?

가운데의 거북이가 물을 뿜어내고 있는

커다란 탕을 기준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온갖 이름의 작은 탕들이 옆에

10개쯤이나 있다.


잠깐 고민.

낮은 온도부터 서서히 올라가자.

40도 당첨.


우와.

몸이 물에 샤르르 녹아든다.


밖은 겨울이지만

이곳은 촉촉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봄날이로구나.


한참을 탕 속에 앉아

천천히 근처 표지판의 설명을 읽는다.

온천물이니 그 효능은 아주 많지만

김장을 막 마치고 온 아줌마의 눈에는

근육통, 요통에 효과가 좋다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아, 탁월한 선택이다.

수육보다 목욕.


42도. 48도.

온도를 점점 높이며 3층의 탕을 탐험한다.


4층의 사우나도 지나칠 수 없다.


사우나에서

영어가 아니라

북유럽 계통의 언어를 쓰는 금발 외국인과

역시 금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사우나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들썩이는 어린아이 옆에 앉아 있다가

먼저 포기하고 나왔다.


그리고 발견했다.

사우나 옆의 열대 스콜 샤워실과 히말라야 소금탕.


온몸에 뿌려지는 따뜻한 열대 스콜.

부글부글 히말라야 소금이 있다고 하는 자쿠지.


아, 바로 여기야!

열대와 한대 지역이 같이 좋다니.


열대와 한대를 내 품에 고스란히 안고서

내가 이렇게 통 큰 여자인가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달랑 5 포기의 김장을 하고 난

여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취소.


노천탕으로 입장.

비록 규모가 크지 않고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신비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나가는 순간 차가운 겨울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뜨끈한 물의 감사함을 바로 생각하게 된다.


추위도 두렵지 않다.

일본원숭이처럼 빨간 얼굴로

탕 안에서 목만 내놓고 만족스럽다.


위가 뻥 뚫려 있으니

비 특히 폭우가 내리는 날에

비를 맞으며 온천을 즐기러

다시 와야겠다.


어라라.

벌써 약속시간이 되어 간다.

빨리 서두르자.


때는 설렁설렁.

예전 TV에서 어느 한의사가 나와서 말하길

때를 밀지 말라고 했다.


우리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단다.

확증편향.

이런 말은 꼭 기억한다.


후다닥.

씻고 나간다.


다시 만난 남편이 반갑다.

아기처럼 희지는 않지만 뽀얗구나.


목욕탕에 있는 동안 캄캄해진 밤하늘.

목욕탕 앞 호텔의 커다란 선물 상자가 반짝이는 별처럼

눈에 들어온다.


선물 같은 오늘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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