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by 미라




내 아버지인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도
배운 적도, 가르쳐준 적도 없어서
허공에 손가락으로 적으려다가
결국엔 나도
받아쓸 수 없던 말들




이 땅에선 아예 낱말도 아니어서
적자니 실없이 말만 길어져
우격다짐 말줄임표 끝
바들바들 떠는 알몸의 느낌표로
서둘러 바꿔치기 되곤 하던
아직 말벗어 헐벗은 것들




<다음을 가리키는 낱말을 빈칸에 쓰시오>




가까스로 견딜만했던 태양의 첫번째 빛줄기,
뭍으로 왔다 바다로 가버린 고래의 돌연 회향,
바람에 색깔 바꾸는 잎맥 불거진 쪽 나뭇잎,
거미줄에 매달려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
한여름 시골 소나기가 피어올린 땅냄새,
파도 없이 맑은 한낮 바다가 뿜는 고요함,
옷을 찢으며 제 뺨을 때리는 슬픔의 다른 말,
꺾꽂아놓고 잊혀진 꽃가지에 돋은 첫 실뿌리,
아끼던 생명을 실수로 꺼트린 자의 첫마디,
내 기억을 깡그리 잃은 당신과의 첫 눈맞춤,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도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막상 받아쓰려 해도
사는 동안 보고도 꿈에도 몰랐어서
점점 커져가는 빈칸 그대로
백지로 남겨두게 될 테지만





갈비뼈 근처 깊은 곳에서
살아서 달그럭거리는 그것들을
환하고 짧게 단박에 내려 적지 못한다면
신음을 빼닮은 오랜 옹알일망정
나는
새로 써야 하겠다








받아쓰기

Aarhus, Denmark/ 04.2025/ photo. M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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