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구두에 작별을 고함

by 대륙의 변방

패션의 완성은 뭐라고 생각해?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도 있더라? 나는 구두라고 생각해왔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는 구두를 엄청 좋아하는 여성이잖아. 그리고 예전 필리핀 고위층 인사의 한 부인은 사치와 부패가 발각됐을 때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고가의 구두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고. 아마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여자들은 구두 좋아하는 사람 많나봐. 나? 특별히 하이힐 애호가는 아니야. 다만 특별한 경우에 구두를 신는다는 그 '포멀'한 느낌을 동경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 유행했던 '빨간 구두 아가씨'란 노래가 있어. 아마 모르겠지. 노랫말을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있더라고.

솔 솔 오솔길에 빨간구두 아가씨

똑 똑 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이거야 이거. 똑똑똑 구두소리. 나는 개인적으로 '또각또각'이라는 의성어를 좋아하는데 구두를 신고 걸을 때 또각또각 소리는 정말이지 삶의 의지를 샘솟게 하지 않아? 아...나만 그런가?


흔히 하이힐은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말까지 있잖아. 우리 아버지 세대는 그걸 '히루'라고 부르셨다? 굳이 하이힐,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킬힐'까지는 차마 넘보지도 못하는 처지지만. 어쨌든 그 구두를 신었을 때 뭔가 '갖췄다'는 완결감을 나는 사랑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 생각한다 이거지. 우리 소싯적엔 말이야, 그 하이힐을 그냥 일상으로 신었었다? 그걸 신고 버스 정류장에서 냅다 뛰는 일도 아무렇지 않았어. 아, 젊음이란 그런 거지.


한국에서 간혹 신던 구두를, 아니 '힐'을 여기 캐나다에 오면서 별 생각없이 가지고 왔었거든. 그런데 정말로 신을 일이 없는거야. 그러는동안 나는 나이 먹어갔고 구석에 쳐박혀 존재감을 잃어간지 오래였고.


어제는 아들내미 졸업식에 참석하는데 왠지 기분이 내고 싶어졌다? 좀 '갖추'고 싶었던 거지. 그럼 뭘 해야 된다고? 간만에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고 문제의 그 구두를 '장착'한거야. 처음 얼마간은 괜찮았지. 내가 사랑하는 그 사운드, 또각또각. 음 이거지~ 뭔가 내 안의 각 세포를 비롯해 내 몸을 구성하는 실체들이 적당한 긴장감으로 수축하면서 활력을 만드는 듯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슬프게도. 가장 비명을 질러대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부위, 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중을 온 몸을 바쳐서 지탱하는 최말단 신체부위인 발 말이야.

간만의 또각또각 사운드에 취해 적당히 무시하기엔 그 말단 부위가 보내오는 경고음은 너무 컸다고. 발은 그저 말단부위가 아니라 그 통증이 시위하는 존재감은 나를 온통 지배할만큼 커져만 갔어.


수년간 있는 그대로를 존중받으며 생긴대로 거해온 나의 열 발가락을 포함한 발 구성체들은 어느날 저 위 상단 부위, 즉 뇌에서 불현듯 스친 '기분'이라는 잘못된 동기로 인해 역경이 시작된거지. 자연스럽지 않게 앞이 좁아지고 발뒤꿈치가 좁다란 기둥에 얹혀 높이 들려지는 '힐'이라는 이름의 괴이한 형태의 신발에 우격다짐으로 구겨넣어지게 된 거잖아. 이것들이 주인의 부당한 처사에 인해 고통받자 비명을 질러댄거지.


하루를 어찌어찌 보내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오는 밤 길.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든 안도감은 참으로 컸어. 아, 다 됐구나.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10분을 난 너무 간과했지 뭐야. 이제 더는 못참겠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듯한 내 두 발. 혹사당한김에 조금만 더 견디어 주길 바랐지만 아... 버스에 있는동안 발이 부어서 상태는 더 악화돼 있었던 거야.


문득 무책임한 나의 상단부위, 뇌리에 이런 싯구가 스쳐가겠지? 고딩시절, 국어 교과서에 있었던 거 말이야.


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아무리 고지가 바로 저기라도 점점 자명해지는 진실은 이거였어. 발 아프다~~~~. 아픈건 아픈거라고. 별 도리가 없다고. 옆에 딸래미에게 말했어. 만약에 저 앞에까지 가면 1억을 준다고 쳐. 그러면 아픈 걸 참고 태연하게 걸을 수 있을까? 딸래미는 맞장구 쳐. 아 그럼. 할 수 있지 1억인데 엄마. 오 그래, 좀 나은 거 같은데? 그런데 좀 지나니 허위의 '억발'이 떨어지고 여전히 심하게 아파왔어. 내가 또 흰소리를 했지. 만약에 말야, 저 앞에서 정우성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나는 꾹 참고 경쾌하게 또각또각 걸을 수 있을까. 아, 그럼 엄마 정우성인데... 옆에서 묵묵히 걷던 아들래미는 더는 못듣겠다며 저 앞서 성큼성큼 가버리더라고. 푸하핫.


어쨌든 나는 하이힐 신었을 때의 효과라는 허리를 곧추 세우기는 커녕 무릎도 엉거주춤 구부린채 최대한 발을 덜 아프게 하기 위해서만 걷는, 엄청 우스운 모양으로 걸음을 옮기기에 급급했지.

어쨌거나 집에 도착해 구두를 벗어던지고 더운물에 발을 담그고 주무르며 마구 사과했어. 발아 발아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내 구두 욕심은 만용이었으며 허영이었다네~를 인정하면서.


잠자리에 들기전, 퉁퉁붓고 여기저기 뻘건 내 발을 내려다보며 생각했어. 아픈건 아픈거다. 아프니까 발이다? 아프니까 구두다? 뭐 이딴거 읎다고. 이를 악물고 참아보거나 다른 생각으로 돌려봐도 아픈건 어디 갈 수 없다고. 그렇다면 바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면 생각의 고통, 심리의 고통같은 건 달리 보기로 마음먹음으로써 상황을 낫게 만들 수 있는거 아닐까. 어때 이것도 '1억'이나 '정우성' 최면과 동급 푼수짓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해서 나는 이제 구두를 신을 수 없는 몸이 되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구두를 경애해. 구두의 또각또각 경쾌음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와의 사랑을 추억으로, 그리고 판타지로 간직할라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닌 거라고 가수 김광석이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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