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때'가 있다. 사는 동안 원하는 것을 얻거나 어떤 기회를 갖게 되는 상황을 일컬어 많이 쓰이는 말이다. 주로 일이 잘 안됐을 때 위로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노력은 사람이 하지만 하늘이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다.
나는 이 말들에 대체로 동의하는데, 여기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하나 보태게 된 '때'가 하나 더 있다. 사람은 죽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단, 자연적으로 생명이 다 되는 '때'를 말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 '때'가 다가오면 대개 일단 먹지않고 마시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느끼곤 한다. 자연적으로 기능이 퇴화해서 못먹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육신이 더는 영양공급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 인간의 무의식 영역에서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서 뭔가 결연함 같을 본다면 억지일까. 살아있음의 마무리를 더는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비우고 떠나기? 같은 것일까.
내가 일하는 널싱 홈에 거주하는 환자들은 그 '때'가 오면 연명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겠다고 미리
서명한 경우가 많은데, 그 '때'의 언저리 기간동안 병원에 보내지기 보다 있던 곳에서 최대한 편안함에 초점을 둔 돌봄 서비스를 희망한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마지막 순간들을 평화롭게 가진뒤 존엄함 죽음을 맞길 바라서다.
징후는 동일해도 그 기간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오래 가는 사람도 있고 너무 갑작스럽게 보일만큼 빠른 사람도 있다. 흔히 998812라 해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앓다가 죽는 것이 복이라고도 한다. 기간이 얼마가 됐든 삶의 마침표를 찍는 시점까지 죽음은 그 개인이 마지막으로 완수해야 하는 과업같아 보인다.
대개는 그 '때'가 오면 기존에 복용하던 약들은 다 중단되고 진통제를 비롯한 두어가지 약들이 주사제로 처방되는데 최대한 통증을 줄여 편안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나는 평소 그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통증은 필연적이라고 여겨왔고 그 통증의 시간이 없으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흔히 부고 에 있는 '가족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떠났다'는 문구를 다만 미화된 상투적인 수사일뿐 실제로 그럴 리는 없다고 굳게 믿어왔다.
어제 밤 근무 때의 일이다. 한 환자가 여러 날동안 '때'의 뚜렷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만 생명이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약을 그대로 복용하고 식사는 자주 거부하지만 누나가 방문해 있으면 잘 먹을 때도 있는 그런 환자였다. 저녁 때 혈당이 낮게 떨어져 있었는데 당분이 든 주스 마시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호흡도 안정적인 상태에서 눈은 뜨고 있는데 인사를 건네도 반응이 없었고 평소 혈당 체크를 위해 손가락에 피를 내면 '넌 항상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가만히 있었다.
한 두시간여 후에 그를 들여다 봤다.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 통증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했다. 아, 그 '때'가 오늘밤중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는 그에겐 누나가 그의 친밀한 보호자였는데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나에게 연락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간 동안 그의 숨은 멎었다. 마약성 진통제 한 번 안쓰고 그의 생은 끝이 났다.
그 와중에 다른 환자가 낙상을 해서 그에 따르는 일을 해야하는 동안에도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새벽에 연락받고 달려온 그의 누나에게 그 얘기를 꼭 해줘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그의 마지막은 고통이 없이 편안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소식을 듣는 가족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보통 한밤중이라도 장례식장에서 와서 시신을 옮겨 가는데, 그 누나는 자신의 남동생이, 아침까지 기다렸다가사람들의 'dignity walking'-직원이나 다른 거주인들이 시신을 뒤따르며 건물 입구까지 배웅하는 일- 을 받으며 생애 마지막 지내던 곳을 떠나길 원했다.
정작 그의 끝순간을 지켰던 나는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고 이른 아침 밤근무를 마치고 퇴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