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어단어는 dignity다.
예전에 독특한 말투와 '뽜숑'으로 유명했던 어느 패션 디자이너가 즐겨 썼던 '앨레강스'하며 '퐌타스틱'한 분위기 말고도, 패션계에서는 옷을 두고 평가할 때 이 말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남다른 '디그니티'가 돋보인다, 범접할 수 없는 '디그니티'를 뿜어낸다... 하는 식으로.
dignity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우리 사회에서는 dignity를 대개는 권위나 직위가 주는 높은 혹은 비싼 품격 정도의 의미, 혹은 고고함? 암튼 잘나신 너네들의 아우라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살면서 dignity는 그런 의미로 쓰이는 말이 아니라고 막연히 느끼게 되었다. dignity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는 것이지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거나, 고가 브랜드의 상품을 소유 또는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거나 뿜어지는 그 무엇으로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respect' 되어야 하고 'support' 되어야 하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고 적어도 나는 받아들였다.)
쉽게 말해, 누구든 함부로 대해지지 않을 최소한의 경계선쯤?
그러면 이 dignity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적당할까. '존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존엄'에 관련해 어디선가 보고 맘에 들어 노트 어느 구석에 베껴 적어놓은 글귀가 있었다.(글에 인용하게 될 줄 모르고 출처를 안 적어 놓아서 아쉽게도 누구의 말인지 모름)
'존엄함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지는 태도의 문제이다.'
현재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숱하게 들리는 '갑질'은 바로 타인이 갖는 dignity, 존엄이 철저히 무시되는 증거가 아닐까. 위의 글귀처럼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지는 태도까지 안 가더라도 인간이 인간에게 적어도 그러면 안 되는 태도까지만 돼도 백화점 주차장에서 VIP 회원인지 모를 번지르르한 사모님에게 젊은 주차요원이 무릎 꿇는 일은 안 일어날 텐데.
또한 존엄은 비교급이 있을 수 없는 개념인데 현재 우리 사회는 있는 모양이다. 누구의 존엄이 누구의 존엄보다 더 귀하거나 덜하거나 하는 일이 성립될 수 없는 일인데. 최근 이국종 교수의 아주대 의료원장과의 갈등 소식은 내게 꽤나 충격이었다. 우리 사회 최고 선망 직업인 의사인 데다 그쪽 분야의 탁월한 능력의 전문가로서 유명세도 있고 국민들의 존경까지 받아온 그도 그 위의 직급에 있는 사람에게 '새끼'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가 가진 타이틀이나 업적이 아니어도, 중년의 나이가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새끼'소리를 듣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의료원장이란 사람도 그 위의 누군가에게 욕설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이국종 교수가 그런 수모를 당한 이유는 단지 그의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직업) 윤리, 바로 '인간(의사)이 인간(환자)을 위해 책임지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다쳐서 만신창이가 된 인간은 우선 치료 대상이 되어야 '존엄한' 존재로 취급된 것이 된다. 병원 재정의 흑자에 기여하는 것과 관계없이. 어디선가 멀리 위독한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헬기 소음을 문제 삼는 민원인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뭣이 중헌디?
소위 '뽀대'나는 인간들은 넘쳐나는데 진정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하여는 씁쓸한 에피소드들을 너무 많이 보는 요즘, 확 나를 사로잡은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무엇이 인간인가- 존엄한 삶의 가능성을 묻다.'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 오종우의 한마디를 옮겨보면,
'산다는 건 회계장부를 만드는 일과 다르다.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는 일도 아니다. 수량을 세어 점수를 매기고 도표로 실적을 헤아리는 게 인생이 아니다. 산다는 건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고,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일과 같다.'
삶을 회계장부상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들으면 비루한 자들의 패배적인 소리라 일축할지 모르지만 나는 구미가 당긴다. 갈수록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것 같은 세상에서 '쩐'없이도 존엄한 삶의 가능성, 끊임없이 모색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