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에 프로야구 40주년을 기념하는 '나와 너의 야구 이야기' 코너에, 나의 야구에 얽힌 사연을 보냈더니 채택이 되어 6월22일자 신문에 실렸다.
야구가 주제인 지면에 글을 쓰게 되다니, 나로선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고교 시절 버스를 타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고교야구 중계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던 사람이니까.
그 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도 내게 야구는 관심 밖이었고, 몇 년이 흐를 때까지도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가 아닌 “삼성 대 라이온즈”를 말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최상급 ‘야알못’(야구 알지 못하는 이)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야구를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던 내가 프로야구 40주년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일까. 이게 다 아들 녀석 때문이다.
아들의 한국 프로야구 사랑은 참 유별나다. 10년 전 캐나다에 이민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아들에게 알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갑자기 표정이 침울해지더니,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다. 차분히 이유를 물으니, 답인즉슨 “사랑하는 한국 야구를 등질 수 없다”는 것.
아들아…! 캐나다엔 한국 프로야구를 능가하는 메이저리그라는 게 있단다. 한국의 뛰어난 선수들이 꿈꾸는 무대인데, 네 정녕 그곳에 가보고 싶지 않단 말이냐. 완강한 녀석에게 비굴할 만치 달래고 꼬셨던 기억이 있다.캐나다에 와선 낮과 밤이 거꾸로인 시간대를 맞춰 한밤중에 일어나 경기를 챙겨 보려 드는 녀석과 참으로 실
랑이도 많이 했다. 토론토에 있는 야구장인 로저스 센터를 다녀온 날, 난생 처음 보는 돔 구장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2% 부족한 그 ‘무엇’이 녀석으로 하여금 한국 프로야구 경기장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아들을 사로잡았던 한국 프로야구의 매력은 무엇일까. 비밀이 밝혀진 것은 지난 2015년,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됐을 때다. 녀석에게 있어 벼르고 벼른 한국 방문 하이라이트는 바로 야구 경기 관람이었다. 수원에 있는 케이티(kt) 위즈 파크에서 열린 기아(KIA) 타이거즈와 케이티 위즈의 경기. 녀석은 기아 타이거즈 ‘왕팬’이다.
실례를 범할까봐 경기앞둔 선수들 가까이는 가지도 못하고 주차장 버스앞에서나마...
드디어 경기 시작 시간이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옆에서 흘깃 본 녀석의 표정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자랑스러움을 다 담은 듯한 표정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오래지 않아 캐나다에서 그동안 녀석을 못내 아쉽게 만들었던 그 ‘무엇’의 정체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2022 KBO리그 개막전 기아 타이거즈와 엘지 트윈스의 경기. 광주/연합뉴스
“워워 워워워 미치도록 사랑한다. 기아 타이거즈. 최!강!기!아!타!이!거!즈! 미치도록 사랑한다.”
힘찬 응원단장의 구호 아래 팀 응원가는 물론 선수 개인별 응원가까지 울려 퍼지는 경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면 ‘삼진 짝짝짝’에 ‘삼∼구 삼진’ 등 약 올리는 추임새에다 투수가 1루나 2루에 나가 있는 상대 팀 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지면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오고, 맞은편에선 이에 맞선 야유가 또 이어진다. 그뿐인가. 가끔 톡 쏘는 양념처럼 등장하는 풋풋한 청춘들의 현란하고 힘찬 치어리딩까지. 이 모두가 얼마나 재밌는지!
경기가 끝으로 향해갈 무렵, 캐나다에서 부족했던 2%를 꽉 채우고도 넘쳐 이제 뜨겁게 결속된 에너지가 시원하게 분수 터지듯 분출되는 시간이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기아∼.”
후끈후끈 왁자지껄한 경기장을 걸어 나오면서 녀석이 내게 말했다. 남행열차 부르는데 옆에서 엄마 목소리가 커지더라며 엄마가 어떻게 기아 응원가를 그렇게 잘 아느냐고. 아들아, 그만한 일로 네 어미가 다시 보이더냐. 별로 대단찮은 일로 그런 존경의 눈빛을 받으니 심히 쑥스럽구나. 녀석은 대한민국 중장년층이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 1위가 ‘남행열차’인 걸 모르고 제 엄마가 기아 응원가를 불렀다고 여겼다. 그날 엄마와 아들은 그렇게 하나가 됐다.
2018년 여름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서울 고척 스카이돔을 찾았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생긴 돔 경기장은 참 컸는데, 관중석이 텅 비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기아와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 2군 경기라고 했다. 이번엔 아들 녀석보다 내가 더 몰입했는데,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야 기본일 테고 다들 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열띠게 호응하고 싶었다. 그날 기아팀이 이겼는데, 내심 남행열차를 부르겠구나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끝내 하지 않았다.
1군경기였으면 앉아보기 힘든 자리에 앉아.
2021년은 팬데믹으로 야구 경기장은커녕 한국 방문 자체가 힘든 시기였기에, 야구장 가본 지가 참 오래되었다. 인터넷으로 무관중 경기를 치르는 한국 야구장 모습을 보며 내심 안타까웠다. 특유의 흥으로 한국 프로야구에만 있는, ‘2%를 꽉 채운’ 관중들의 열기를 한국에서 조만간 온몸으로 느껴 보기를 기대한다.
오리진 (캐나다 토론토)
출처.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