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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세계에서 J로 살아남기

by mingdu

흔히 MBTI에서 J는 '계획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Judging(판단형)*을 의미하며, “계획적이고 구조화된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려는 성향”이라고 설명된다.


나는 그다지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다.

갑작스레 놀러 나가는 걸 좋아하고, 여행도 비행기와 숙소만 정해놓은 뒤 느긋하게 다니는 스타일이다.

그런데도 MBTI를 할 때마다 늘 J가 나오는 이유가 뭘까? 의문이 들어 J의 특징들을 다시 살펴보았고, 결국 ‘통제형’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예측 가능한 삶, 통제 가능한 상황을 선호하는 나는 꼭 계획을 세우지 않더라도, 계획된 흐름이 어그러지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그 스트레스는 때로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생각이 막혀 잠시 멍청해진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이런 나에게 개발자라는 직업은 꽤 오랜 시간 동안(어쩌면 지금도) 버거운 일이었다.

물론 어떤 직업이든 예기치 못한 일은 생기기 마련이지만, 개발자라는 일은 그 빈도가 유독 잦고, 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퇴근 무렵이나 퇴근 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장애 대응

• 여러 업무를 진행 중인데, 급하다며 새로운 일들이 계속 추가되는 상황

•힘들게 일정을 맞춰 개발을 완료했지만, 기획이 바뀌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경우 등


이런 일들은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에게는 정말 가혹한 시련이었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나에게,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늦는 날들이 많아졌고, 정해둔 일정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어긋났다.

개발 자체보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버텨야 한다는 점이 더 괴로웠고,

'이 길이 과연 나에게 맞는 걸까?'

'좀 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 나에게 맞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첫 번째, 두 번째 직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난 뒤부터는 마인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누구나 힘들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우선, 마음에 여유를 두었다.

“언제든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지금 내가 모든 걸 다 감당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조금씩 편하게 해 주었다.

실제로 급하다던 일들도, 내가 야근하며 힘들게 처리했지만 정작 당장 필요하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고, 기획 변경으로 다시 해야 했던 일들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처리하긴 어렵다.”

“최대한 빨리 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같은 말을 차근히 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렵게 느꼈지만, 이젠 무턱대고 거절하거나 "안 돼요"라고 하기보단, 구체적인 이유와 함께 가능한 해결 방향을 설명하며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반대로 정말 급한 일에는 "그래, 지금은 하는 게 맞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집중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균형을 맞춰가며, 내 생활도 어느 정도 지키면서, 일에서는 성과를 낼 수 있었고, 스트레스도 줄어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는 에너지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느낀 건, 성향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건 ‘절대적인 성격’이 아니라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변수’라는 점이다.

아직도 불합리한 상황이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스트레스를 받긴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있고, 앞으로 몇 년 뒤의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겨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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