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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대로되는사람 Mar 20. 2022

엄마가 되면서 언제나 가장 어려운 건 감정조절이었다

엄마반성문을 쓰면서 깨달은  것들

 엄마가 되면서 언제나 가장 어려운 건 감정조절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아이 키우면서 가장 힘든 일이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감정조절’이다. 성격은 급하지만 욱하는 감정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건드릴만큼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될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경솔한 행동 같은 것쯤은 어느 정도 조절이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서 달라졌다. 감정조절이 정말 쉽지 않은 순간들이 많다.


 감정조절이 안 되는 엄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원래부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처음부터, 그런 엄마는 아니었다는 얘기를 먼저 좀 해보고 싶다. 엄마가 처음이니 모든 게 낯설고 서툴렀지만 보통의 엄마에게 기대되는 정도의 육아는 근근이 해내 왔다고 생각한다. 워킹맘으로 살면서도 아이의 옷은 손세탁을 고수했고, 아이의 이유식도 직접 만들어 먹였다. 아이의 머리손질과 옷차림도 늘 신경을 썼으며, 유독 잠 덫이 심했던 아이를 다섯 살이 되도록 업어서 재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들에 대한 미안함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업어줄 수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끊어질 것 같은 허리 통증과 어깨 통증을 이겨내며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를 등에 업고 아이의 온기를 온전히 느꼈던 그 시간들과 그때 느껴졌던 아이의 숨소리가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밖에서 지친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평온함을 유지하게 하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아이에게 내 아이만을 위한 사랑노래를 지어 자장가 삼아 수없이 불러주면서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했다가 따뜻해지곤 했다. ‘기쁨이,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엄마도 사랑해. 아빠도 사랑해. 예수님도 사랑해. 정말 사랑해.’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는 “엄마, 내 자장가 불러주면서 재워줘.”라고 요청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유난히 아이가 속상한 일이 있었거나 기분이 좋은 일이 있었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주저 없이 또 내 아이만을 위한 자장가를 끊임없이 리플레이하며 행복한 엄마가 된다. 사춘기가 되더라도, 성인이 되더라도, 아이가 요청할 때면 언제든 기꺼이 들려줄 것이다. 내 아이만을 위한 자장가 얘기를 하니 어느 책에 소개되었던 아프리카 동부의 어느 부족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부족의 여인들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아이의 노래를 부르고, 아이가 다치거나 몸이 아플 때도, 심지어 그가 죄를 짓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때도 그를 마을 한가운데 세워 놓고 그의 노래를 불러준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 그가 세상에 온 이유를 기억하게 하는 의식이며 그를 바로잡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비난과 질타와 매서운 눈초리 대신 그가 그 노래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는 것은 사랑이다. 책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아이에게 사랑노래를 지어 불러준 나 자신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도 내 아이에게 언제나 내 아이만을 위한 자장가를 불러주어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말이 길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를 위한 사랑노래를 지어 불러줄 만큼 꽤 노력하는 엄마였다. 아이의 언어발달이 늦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안고 ‘늦된 아이를 위한 엄마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 2년 남짓 미친 듯이 밤을 새워 육아서와 관련 자료들을 읽어내며 내 아이에게 맞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목을 사용해야 하는 일터를 벗어나면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이겨내면서까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역할극 놀이를 해주었다. 어떻게든 아이의 말문을 열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만큼의 자신감을 갖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흔한 방문학습지 한번 시키지 않고 학습적인 모든 부분까지 채웠던 내가 아닌가?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써왔고 수시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인내심 제로인 내가 아니었는데...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도 세상에 태어나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라고 자신하며 감사하던 나였건만... 언제부터였을까? 늦된 아이를 위한 남다른 육아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어느 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니다. 꼭 내 아이가 세상에서 엄마 없이도 너무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독립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마음먹은 그 어느 날부터였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나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조절이 안 되는 형편없는 나와 마주해야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있었다. 뭔지 모를 격한 감정, 가라앉지 않는 어떤 감정, 때론 분노처럼 느껴지는 감정들이 목까지 차올라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히기 위해 무작정 걷기도 하고,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나와 같은 감정들을 가졌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책 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아이의 많은 성장과정 중 한 부분인 언어가 조금 느릴 뿐이었는데 아이에게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완벽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던 그 바람이 한순간 무너진 듯 내 삶을 흔들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육아를 시작하며 겪은 어려움 중에 말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아이의 답답함과 짜증, 불만을 모두 받아내기란 내게 최고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같은 상황을 수없이 설명하고, 엄마가 없는 공간에서 겪었을 아이의 답답한 마음을 만져주는 일들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늘 몸은 녹초가 되고 마음은 만신창이가 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조절 안 되는 엄마를 부추기는데 일등공신(?)을 한 사람이 있다면 내 아이의 아빠, 내 남편이다. 남편은 아이들을 정말 예뻐하는 사람이다.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절로 미소를 짓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결혼 전에는 동생네 쌍둥이 조카들을 어찌나 예뻐하던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정부모님들은 항상 말씀하셨다. ‘나중에 지 새끼 낳으면 얼마나 이뻐할까?’ 정말 그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했던 남편. 그런 남자 친구와 결혼을 생각하며 아이 다섯 정도는 낳아 기르고 싶다는 옹골진 꿈과 야무진 계획들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딸랑 딸아이 하나다.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지만 둘째를 갖기 위한 노력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남편과 아이를 키우며 또 생기면 감사히 키우고 아니면 하나라도 잘 키우면 되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도 아셨겠지. 우리에게 다섯 명의 아이는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남편은 육아에 ‘육’ 자가 아니라 ‘ㅇ’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아이를 너무나도 예뻐했지만, 딱 거기까지. 예뻐하기만 했다. 예쁘면 기저귀도 갈고, 이유식도 만들어 먹이고, 놀아주기도 해야지, 어찌 된 일인지 손발은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만 예쁜 그림 감상하듯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2시간씩 잠투정 아이를 업고 달래 침대에 눕혀놓으면 정말 사랑 가득한 눈으로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내게 말을 건넨다. “나는 우리 딸 숨소리만 들어도 너무 좋아!” 그러면서 아이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입술과 볼에 연신 뽀뽀를 해대다 결국 아이를 깨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밑바닥까지 쌓여있던 감정이 폭발한다. 설 잠을 자고 깬 아이의 다음 액션은? 이미 상상한 그대로다. 정말 예뻐만 하는 남편의 육아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이제는 기대도 안 한다 하는 시점과 일과 육아로 지친 내 감정조절의 끝을 경험하고 있었을 그때, 아이를 기관에 보내면서 남편은 변하기 시작했다. 등 하원 길에 딸아이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리 아이의 언어발달이 늦고, 자연스럽게 사회성 발달도 늦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는 육아에 관심을 많이 갖는 아빠가 되어가고 있다. 아빠가 수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아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수 개념조차 깨우쳐주지 않아 한 모둠에 5명이 들어가는 놀이 영역에서 여섯 번째 등장인물이 되어 고집을 피웠다는 선생님의 하원 길 인사멘트는 아빠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조금씩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던 아빠에게서 뭔가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인 나의 요청 없이도 아이에게 가르쳐 줄 것들을 가르치고, 입 짧은 아이의 식사도 챙기고, 체력이 안 되는 엄마를 대신해 함께 몸으로 놀아주고, 놀이터나 공원에 데리고 나가 자전거, 킥보드, 롤러, 줄넘기 등을 가르쳐 주는 적극적인 육아를 시도하면서 엄마를 돕는 아빠가 되었다. 그러면서 아빠 자신도 때론 감정조절이 안되어 스스로 자책하는 경험을 몇 차례 겪고 나더니 비로소 아내인 내 감정에 조금은 공감하며 함께 하는 육아로 적극 바뀌어가게 되었다. 때론 맞지 않아 부딪힘이 있을 때도 있지만, 아빠가 참여하는 육아는 엄마의 감정조절 연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왜 나는 조곤조곤 말해주는 엄마가 되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는 엄마일까? 아이에게 화를 다스리지 못해 폭발한 날이면 어김없이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자괴감이 뒤따랐고, 따뜻하게 받아주지 못한 미안함에 많은 시간 함께 해주지 못하는 워킹맘이라는 이름까지 더해져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 수많은 육아서에서 말하는 일관된 육아는 또 온 데 간데 없어지길 여러 날 반복하며 나는 ‘감정조절’을 내 육아의 첫 번째 이슈로 올려놓았다. 아이의 자기주장이 점점 강해지는 시기와 언어발달의 지연 시기를 함께 떠안은 채 시작된 엄마의 감정조절 연습은 언제나, 어김없이 후회와 반성의 시간들로 반복되고, 거듭거듭 물음표와 느낌표를 붙여가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도 마음을 다잡기 힘든 상황들과 마주할 때면 골방에 쳐 박혀 마음속 감정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때론 공격적으로 변해버린 내 감정에,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내 감정들에 분노하며, ‘감정조절’이라는 궤도를 벗어나 한바탕 퍼부어댄 종이가 새까만 글씨들로 몇 장씩 채워지고 나면 나는 비로소 어둡고 침울해서 미칠 것 같았던 내 안에 감정동 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내 감정을 의식하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대화를 나누고자 시도하는 글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가 되면서 언제나 가장 어려웠던 ‘감정조절’이라는 큰 숙제를 이렇게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아빠와 함께 하는 육아, 책과 글쓰기는 그런 엄마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래서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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