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May 13. 2020

미국 남자와 결별(?)은 처음이라

아직 이별을 극복하지 못했다.


살면서 두 번째로 호흡곤란을 겪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러다 미쳐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내 곁을 떠나갔다.


남자만 득실득실한 집안에 첫 손녀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사랑을 듬뿍 받던 나는


할머니가 특히 예뻐해 주셨다.


내가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격하게 반대하셨다.


사주팔자나 점을 신실하게 믿으셨는데


내가 미국에 가면 관계가 소원해질 거라고 했다고 하셨다.


물론 물리적으로 멀어지기 때문에 마음으로도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때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지금 그 이유로 반대하셨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나의 유학에 보태줘야 할 아버지의 무게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매우 크셨으리라.


난 그 모든 것을 등에 지고 미국으로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 민익씨와 헤어지기 하루 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죽은 사람을 내 눈 앞에서 지켜보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지막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잔뜩 찌푸린 얼굴만 보았는데, 아기같이 얼굴이 편안해졌다.

여전히 따뜻하던 손이 점점 차게 식어가는 게 아쉬워 계속 '할머니, 할머니...' 하며 열심히 내 손을 문질렀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대성통곡은 없고, 드라마틱하지 않은 담백한 헤어짐이었지만 그 파장은 길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할머니가 살아생전 반대하셨던 나의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도 내가 꿈꾸던 공부는 아니었고,


영화에서 보던 화려한 뉴요커의 삶은 영화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친구나 연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는 내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어나더 레벨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한국에서는 마음에 맞는, 거의 비슷한 또래의, 생각이 비슷하고 생활습관이 비슷한 혹은 비슷해진 사람들끼리만 함께 지냈다.


나와 너무 다르다 싶으면 멀어졌고, 너무 다른 사람들의 무리를 만날 기회도 없었다.


미국에서는 온갖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중국 억만장자 부잣집 딸내미부터 빚을 져서 어쩔 수 없이 이민길에 떠났지만 아직도 비자가 없어서 불법체류자 신세로 살고 있는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동안 만들어 온 인간관계와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학교에서 왕따, 회사에서 은따, 헤어질 때 폭력성을 드러내던 전 남자 친구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가 미치지 않고 한국에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아.
남들이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니야.


라는 좌뇌의 논리적인 외침의 한 켠에는


내가 잘못한 거 아닐까? 내가 그동안 이상한 사람이었던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싫어하는 걸까?
난 정말 한심하고 못난 사람이야.

라는 우뇌의 감성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젖어들다 빠져나오고 젖어들다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난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미국 땅을 떠나며 얻어 온 것은

민익씨와의 행복한 연애,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아직 다행히도 끊어지지 않았던 우리의 결속이라고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가 끝났을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연애에 올인했다.

브런치에 그와의 기억을 기록하며

그 전에는 불만을 토로할 법한 일에도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라고 

가끔은 합리화를 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내고 난리를 쳤을 법한 일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썩어 들어가도 관계의 행복은 내 마음보다 중요했다.


내 미래

내 직장

내 일 보다는


우리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


내 감정보다는

그의 감정을 중요시했고,


내 의사보다는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나보다 그에게 한참 쏠려있던 무게는 그에게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뇌의 외침이고, 


그를 이해하고 싶은, 성숙해지고 싶은 내가 펼치는 합리화와


원한과 미움과 분노가 쌓여 한동안 가슴팍에서 내려가지 않던 묵은 화 때문에 숨도 잘 못 쉬었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고 싶어 하는 나의 미숙한 감정이 부조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너의 원래 모습도 괜찮아."


친구가 전에 알던 내 모습과 브런치에 적는 내 모습이 많이 다르다며 내게 말을 건넸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동안 난 민익씨와의 관계를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원래는 질투심도 많은데 연상녀의 배포를 보여주겠다며 신경 쓰지 않는 척했고,

그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요구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무한정의 자유를 줬다.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를 잃어버리고, 

내 앞길을 먼저 챙기지 않고, 

모든 것을 은근히 그에게 의지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히스테리를 부리던 내 모습의 일부는 후회한다.


내가 있어야 남자도 있고, 

내가 있어야 연애도 있고, 

내가 있어야 결혼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니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이 글을 보면서 또 이불을 걷어차겠지.


그럼 지우면 되니까 또 괜찮다.



헤어지고 돌아온 길에 내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이제 뭐 먹고살지...?'였다.


민익씨와 헤어진다고 해서 먹고살게 없고, 사귄다고 해서 먹고살게 있는 것도 아닌데.

우습게도 그 말이 먼저 나온 이유는

그동안은 먹고사는 일보다 연애가 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들어와 새까만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있는데, 

왠지 영원히 혼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거울을 보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해.

너 마음을 몰라주고 괴롭혀서 미안해.

못났다고 타박해서 미안해.

아무도 네 곁에 없어도 나만큼은 네 곁을 지켜줄게.

나만큼은 죽는 날까지 너의 친구가, 연인이, 사랑이 되어줄게.

사랑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건넨 대화였다.


눈물이 철철 났다.


늦깎이 연애의 후폭풍은 이렇게 엄청난 것이었다. 


8살이나 연하에, 미국인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충격이 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지난 글을 써 내려갔지만

사실은 아무랬다.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래도 혼자는 아니구나.'

행복하기도 했다.

매번 내가 글을 쓰자마자 처음으로 좋아요를 눌러주시던 분까지 댓글을 달아주셔서 정말 기뻤다. 


얼마 전 타이밍이 절묘하게 연락이 와서 나갔던 데이트에서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썸남의 호의를 한껏 느끼고 왔다.


아직 그 분과 잘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스스로를 먼저 챙기고, 내가 할 일을 중히 여기고,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준비가 될 때까지,

연애 중독녀는 당분간 수녀님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멘탈이 허약해질 때 제 일기처럼 가끔 주절주절 하려고요. 이해해주실 거죠? 따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