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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Feb 07. 2021

헤어진 민익씨를 다시 만나다

우리 헤어졌어요 ep2


“안녕”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친구라고 하기엔 가깝고 연인이라고 하기엔 머나먼 그 이름.


전남친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함께 있을 때 환하게 웃던 일들을 떠올리며 울던 밤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잘 지냈냐고 물을 새도 없이 곧장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너무 정신이 없어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은 이번에도 민익씨가 정했다.

베트남 요리를 먹자며 음식점 링크를 보내왔다.

과연 헤어지고 첫 만남에 베트남 음식이 바람직한 선택인지 의심스럽고, 리뷰가 썩 좋지 않다.


그가 요즘 다니는 한국어 학원의 근처 음식점이란다.


이 마당에 뭣이 중헌디.

민익씨를 다시 만나 먹을 요리가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 모르는 마당에 베트남 요리에 동의했다.


사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 메뉴 결정권은 주로 민익씨에게 있었다.

그 이유는 민익씨가 입맛이 까다로워서도 아니고, 고집이 세서도 아니고,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상황 1

나: 뭐 먹고 싶어?

민익: 음.. 글쎄. 너는?

나: 난 모르겠어. 네가 정해.

민익: 그럼 이거 먹자.


상황 2

나: 나 00가 먹고 싶어.

민익: 그럼 먹으러 가자.

식사 중

나: (아.. 맛없어 ㅠ 괜히 먹자고 했나? 민익씨가 하는 선택이 맞는 것 같아. 그냥 민익씨가 먹자는 대로 먹을 걸.)


이 패턴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내 주장을 잃어버렸다. 관계에서 메뉴를 정하는 것조차 내 선택에 자신이 없었다.

한 외국 영화에서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아내가 자신이 달걀을 부칠 때 반숙이 좋은지 완숙이 좋은지 스크램블이 좋은지 몰랐다는 걸 이혼하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편이 좋아하는 대로만 요리를 해 왔기 때문에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 상황은 단지 메뉴 선택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할 데이트를 정할 때도, 장소를 정할 때도, 듣고 싶은 음악이나 영화를 고를 때도 나는 대체로 그에게 99% 의존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관계에서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아직도 사랑하는 그가 내 앞에 앉아있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 없이 잘 사나 두고 보자 이를 바득바득 갈았는데, 얼굴이 좋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어떻게 지냈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다른 가족들은 어떤지, 코로나가 얼마나 심한지, 일은 잘하고 있는지


너무 시시해서 친한 친구와도 하지 않을 대화들이 두서없이 이어진다.


뚝뚝 끊어진 소식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서로에게 꺼내 보여준다.


내가 그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거쳤는지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나오는 순간 그가 너무나 미워질지도 모른다. (밥상을 뒤집어엎을지도 모른다.) 그저 잘 지낸 것처럼 웃는다.


조용히 밥을 먹다 갑자기 민익씨가 말을 꺼낸다.


“내가 우리의 헤어짐에 원인을 제공했던 이유는...”


커다란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헤어질 때 흘렸던 눈물에는 시차가 있었다.

내가 한바탕 폭발을 하며 오열을 하고, 그 폭발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민익씨도 울었다.

다 변명처럼 들리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울던 그의 모습이 괴롭게 겹쳐온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나름 간단했다.

민익씨가 한국에 오면서 나는 지극정성을 다해 그를 도왔다. 늘 그의 동네에서 그가 고르는 메뉴를 먹고 그가 고르는 영화를 보며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가 하자는 데이트를 했다. 내게 부탁하지도 않은 일들을 선심 쓰듯 이것저것 도우며, 그가 내게 친절하지 않다고 느끼면 한없이 서럽고 서운해했다.

그에게 의존하는 양이 많아질수록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내가 해 준 만큼 그도 내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울면서 떼를 썼다.


반면에 민익씨는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면서 모든 것이 즐거워 보였다. 나와 지내는 시간보다 민익씨의 직장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함께 만드는 추억 또한 나보다는 그들과 더 많이 쌓았다.


하루는 민익씨가 나와 데이트하기로 한 전 날 직장 동료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놀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한 곳에 데이트를 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그는 속이 좋지 않았고,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집에서 시원하게 오바이트를 한 후에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그의 해장을 도우며 하루를 보냈다.


나를 만나러 한국에 온 게 아니라 그냥 놀러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표를 찍기 전 그가 털어놓았다.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결혼을 축하하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미국 나이로 25살인 그에겐 그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단다.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계기로 보기엔 너무나 변명 같았지만, 어쨌든 그는 나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미래가 불투명한 관계를 스물다섯이 아니라 서른다섯의 여자가 바라보고 있기에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고 이래서... 나와 다시 만나줄 수 있을까? 너는 날 좋게 봐준 사람이야.”


직장 동료와 큰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나도 아는 직장동료다. 민익씨가 생전 누구와 싸울 사람이 아닌데, 그 동료와 싸웠다고 하니 이해가 간다. 그 동료는 항상 어딘가 화나 있었고, 술을 마시면 누군가를 표적으로 정해 싸우곤 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난 걸까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철철 흘리는 눈물 앞에 사이코처럼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눈물이 무색할 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 자신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도 않았다.


그동안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서 그에게 쏟을 눈물의 양이 말라버린 것 같았다.


“나는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아주 조금밖에 예상을 하지 못했어... 생각을 해보자. 나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거든.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나는 모르겠어.”


사실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앞날이 불투명한 관계에 더 이상 내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잊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인생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명언까지 되새기며 이를 악물고 살았다.


“너 젤라또 좋아하지? 젤라또 먹으러 가자.”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생각들을 뒤로하고 내가 말했다.


젤라또를 먹다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commitment(관계에 충실하며 헌신하는 것) 할 준비가 된 거야?”


민익씨가 대답도 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어떻게 26년 동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헤어진 지 5개월 만에 그렇게 결심할 수가 있어? 난 이해가 안 돼.”


젤라또를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 민익씨가 웃으며 말한다.

“너무 논리적일 필요는 없잖아.”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뜬금없이 헤어지자고 하면 “뭐 그런 말을 16년 원조 주꾸미집에서 해?”라는 코너에 출연한 기분이다.


베트남 요리에 이어 젤라또를 먹으니 배가 부르다. 그의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 오자마자 신발을 사러가야 한다고 했었는데 온 지 8개월이 지난 아직도 안 샀다. 밑창이 뜯어진 운동화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 본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신발을 사러 가자고 했다.


신발을 사고, 그가 좋아하는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그가 좋아하는 피자를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예전의 우리처럼 데이트를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손을 잡지 않았다. 팔짱도 끼지 않고, 달콤한 말들도 건네지 않았다.


그 옆에 서 있는 내가 식어버린 기계처럼 느껴졌다.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 담담하게 말하기가 쉬울 줄 알았는데 쉽지 않네요. 그래서 글 쓰는 것을 계속 미뤘어요. 그래도 예쁘게 봐주실 거죠? 미리 감사합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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