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공개적인 타인의 로맨스
오늘은 날씨만큼 기분이 우중충하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굴렀다. 또 팔이 부러지나 싶었는데 낙법을 사용했는지 이번엔 다행히 부러지지 않았다.
하는 일은 그럭저럭 잘해 나가고 있지만,
매번 완벽하게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괴롭히니 무척이나 사랑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이 피곤하다.
습기와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간지럽히던 청년을 홱 돌아보며 팔꿈치로 가격하던 아저씨를 곁에서 바라보니 오늘 기분이 나만 이런 건 아닌가 보다.
집에 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투정을 부리니 엄마는 위로를 해준다. 따뜻한 위로 속에 알 수 없는 날이 서있다.
엄마는 기분이 안 좋으면 얼굴이 구겨져있다.
나는 엄마의 기분을 알아채는 데 선수인데, 그건 엄마의 기분이 표정에 너무 확실히 드러나서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서른여섯에 아직 집에 얹혀산다.
미국에서 한국에 온지는 2년이 갓 넘었고, 미국에선 모은 돈 보단 쓴 돈이 많아 당분간은 아무리 벌어도 적자다.
따로 방을 구해서 나가기에 여력이 안 되고,
부모님 집이 서울에 있어 일하기에 좋고,
독립하는 순간 부모님과는 영영 떨어져 살아야 하니까 지금 함께 사는 것도 괜찮다는
다양한 합리화와 함께 매달 쥐꼬리만 한 방세를 드리며 살고 있다.
엄마는 잠시 나를 걱정해주는 것 같더니, 내가 한 말 한마디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감이 온다.
이건 엄마가 아빠에게 화나는 일이 있는데 아빠에게 말을 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내 앞에서 아빠가 있을 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고, 아빠한테 맺힌 화를 나에게 푸는 것이다.
나는 종종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본인이 섭섭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엄마가 다시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자
아빠의 언성이 높아졌고,
나는 늘 그래 왔듯 중간에서 중재를 한답시고 거들었다.
나는 싸움을, 갈등을, 긴장을, 고성을, 무례함을, 공격적인 분위기를,
내 예민한 감각을 초토화시키는 과격한 에너지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모든 감각을 지나치게 강렬하게 느끼는 탓에,
작은 일에도 쉽게 불안하고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건 내 탓이 아닌데.
어릴 땐 엄마 아빠가 헤어질까 봐 무서웠다.
아빠의 언성이 높아지면 엄마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
나를 보살펴주는 사람들이 사라질까 겁이 났다.
모든 이치와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내 세상의 전부였던 부모님은,
어느 순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에게 설명해주시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그분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부모님도 사람이었구나.’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결국 두 분도 나와 같은 시간을 먼저 겪은 사람이었고,
미성숙한 상태로 부모가 되었고,
부모가 처음이었고,
나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책임을 두 어깨에 가득 얹고 억지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온 분들이었다.
서른 중반에 들어서서야 다시 바라본 우리 부모님은 엄청난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대체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분명한 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나보다 열악한 환경에 자랐고, 나를 자신들보다는 낫게 키우려 나름대로 노력하셨다.
다만 고마운 점이 많은 와중에도 엄마의 사랑은 나를 화나게 한다.
상대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부족하고,
애정 주머니에 구멍이 뚫려있어서
끝없이 사랑을 확인받아야 하고,
~이렇게 해야만 ‘버림받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처절하게 예쁨과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사랑을 받아도 못 받은 것, 부족한 것, 아쉬운 것을 찾는다.
엄마가 아빠에게 갈구하는 모습은 마치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 같다.
아빠는 엄마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남자이지만, 엄마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남자가 아니다.
어떤 사람의 특정한 모습을 미워하는 데는 그 모습에서 나의 싫은 점이 보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엄마의 사랑이 내 것과 꼭 닮아 열불이 난다.
나는 종종 평화롭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사랑만 듬뿍 받고 원만하게 자라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한다. 그러지 못하는 것을 부모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해 본다.
한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감정들 중에 하나가 ‘애증’이라고 했다.
미워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미운 감정만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두 분의 피 튀기는 사랑을
애증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도 무척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에게
‘부모님을 사랑할래 미워할래’ 중에 고르라면
주저 없이 사랑을 택할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미워도
슬퍼도
안타까워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이 서린 그들의 서운한 푸념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들의 슬픈 기억에 공감하며 함께 슬퍼해주는 것.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속으로 조용히 이해해주는 것.
이제는 각자의 인생을 살기 위해, 나는 홀로 일어서서 가만히 내 어깨를 빌려드리는 것
언젠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눈물 한 방울에도 후회가 섞이지 않을 만큼
내가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그리고 더 많이 돌려드리는 것.
그분들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나의 행복을 가장 최우선으로 삼는 것.
그거면 된다.
그거면 됐다.
품었던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엊그제 내가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유난히 차가운 엄마에게 직접 만든 주스를 건넨다.
맛있게 마셔주는 따뜻한 엄마가 문득 컵에 비친다.
엄마,
내 사랑이 엄마와 좀 닮으면 어때요.
덕분에 저도 사랑을 배우고
행복한 사랑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부모님의 때로는 아픈 사랑이 내 탓이 아니듯,
내 아픈 사랑도 부모님 탓이 아니에요.
사랑해요.
결국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