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졌어요 마지막 편
다시 만나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어제 본 친구 마냥 살가운 연락이 민익씨로부터 다시 왔다.
헤어진 연인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한 말이 그의 마음에 불씨를 지핀 걸까.
고민도 잠시, 헤어질 때의 앙금이 아직 가슴 깊이 남아있던 나는 내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은 듯한 그의 모습에 짜증이 난다.
이제 와서 나랑 뭐 하자는 거지?
나는 의도를 알려면 물어봐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다짜고짜 그에게 전화를 건다.
“Hello.”
하루만 연락이 없어도 그리워지던 목소리.
이제는 연락이 없는 것에 더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와 손절한다는 것은 민익씨에게도 내게도 어려운 일이다.
비정하지만 순리인 것으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응. 나야. 메시지 보고 전화했어. 바빠?”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머 미주알고주알 하루 일과를 나누던 그 밤들이 낯설게 익숙하다.
“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
“혹시 이번에 만나서도 다시 사귀자고 말할 거야?”
“…응”
“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야. 나랑 친구로 지내도 괜찮다면 만나자. 그렇지 않다면…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래. 내가 너희 동네로 갈게.”
싸늘하게 식어버린 줄 알았던 마음이 미어진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이나 의사는 안중에도 없어보이는 그가 안타깝고도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증표다.
“그래. 그럼 우리 동네로 와.”
“알겠어.”
흔쾌히 답하는 그가 괘씸하다. 만날 때는 내가 사는 동네가 어딘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남자 친구에게는 가장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만나기 2-3시간 전부터 유난을 부리곤 했는데, 이제는 동기도 의미도 상실했다. 전의를 상실한 군인같다. 나조차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한국에 왔고 이제 나의 동네까지 친히 와 주는 전 남자친구를 그의 입맛에 잘 맞는 맛있는 음식점에 데려가고 싶다.
근처에 있는 백화점 8층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다. 고급스러운 한국의 위용을 뽐내며 그를 주눅 들게 만들거다.
우리는 만나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5개월 만에 만났을 때 다 뜯어진 운동화를 신고 세상 초췌해보이던 그는, 말끔해보였다. 그 와중에 옷은 미국에서부터 맨날 입던 거 보던 거다. 한결같다.
막상 식당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내가 그에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장난스레 건넸다.
“꼭 우리 사이 같네.”
그가 말한다.
못 들은 척하며 대충 넘겼지만 당황했다.
연애할 때는 혼자서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던 여자가 이렇게 단순해질 수가 없다.
내가 진작 이렇게 심플하게 연애를 했다면 우리는 지금 달라졌을까?
다시 복잡한 생각이 올라오려다 간단히 차단 스위치를 눌렀다.
답답한 노릇이다.
겨우 찾은 레스토랑에 앉아 서로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내가 하려던 일들이 어찌 되가고 있는지 묻는다. 우리는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응원하는 절친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잘 되고 있고, 재미있고 내가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민익씨와 헤어지고 나서 일에 매달렸다. 아마도 그가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까지 왔으니 곧 결혼을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되면 미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일했던 것 같다. 장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기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딱히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서 대부분의 데이트 비용도 민익씨가 부담했다. 나만의 미래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모습이, 민익씨는 한심하거나 부담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와 만날 때 나는 메뉴를 고를 때조차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이걸 고르면 민익씨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하고 먹고 싶은 걸 참고 다른 걸 주문한 적도 있다. 먹는 속도가 느려서 민익씨가 다 먹으면 마음이 급해서 다 먹지 못하고 남기기도 일쑤였다.
내가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민익씨가 다 먹어도 내 속도에 맞춰서 여유롭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멀리 왔으니 내가 밥값을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민익씨는 한사코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모습이다.
“그럼 후식은 내가 살게.”
민익씨는 프레즐을 먹고 싶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나도 같은 가게에서 비슷한 메뉴를 골랐겠지만,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프레츨은 테익 아웃하고 나는 내가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안타까움과 미움과 애틋함과 아쉬움이 번갈아 교차한다.
좋은 인연은 내가 무엇인가에 열심히 매진할 때 뜻하지 않은 행운처럼 다가왔다.
민익씨는 그 귀중한 사실을 내게 다시 깨우쳐줬다.
민익씨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 다음날 스케줄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그를 지하철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는 헤어지는 순간
“우리는 또 만날 거야.”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지만 그 후로 1년이 넘도록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온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게 될 거야.”
민익씨와 헤어지고 한창 힘들어하던 내게 아빠가 운전을 하다 건넨 말이다.
서른 중반까지 크고 작은 이별을 겪은 적도 많지만, 만남도 이별도 늘 새롭고 어렵기만 한 나는 질색을 했다.
몸서리치며 아빠의 조언을 거부했고, 꽤 오랫동안 싫었던 일과 원망스러운 일, 시간을 되돌린다면 내가 했어야 하는 일에 대해 떠올리며 시도 때도 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느 날 화장을 하다 그와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미소 짓는 거울 속의 나를 만났다.
그 회상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분노도 미움도 회한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미련도 없었다.
그저 내 기억 속 아름다운 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미국 남자와 연애를 적어보겠다며 사랑가득했던 주제의 글쓰기가 안타깝게 끝이 났네요. 까마득하게 느껴지면서도 아직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해요. 장황하게 글을 쓸 정도로 애지중지하던 사랑이라 헤어진 감정을 정리하기까지 유난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인생은 길고 그 순간의 우리는 너무 아름다웠으니 예쁜 기억을 마음 속에 묻어둔 채 각자의 아주 조금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거겠죠. 부디 재미나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제 짧고도 긴 연애스토리를 당분간(?) 마칩니다.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공감해주셔서, 친구처럼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