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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Jun 17. 2022

착해야 사는 여자가 클럽에 가면 생기는 일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유흥에 미치는 영향


나는 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은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해야 착하다는 말을 들었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이 높아 보이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제대로 사춘기가 오면서

말을 안 듣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깨달았다

나는 사실 순종과 복종의 정 반대편에 서서 자유롭게 사고 치기 좋아하는 말괄량이였던 것이다


자유로움

일탈

반항

의 가치를 체험했다


(그렇다고 무서운 언니는 아니었고 그냥 조용조용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유별나게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어쩌면 나의 부모님은 다른 보수적인 집안들에 비하면 부드러운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예민하고 섬세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영혼이었다(신기하게 내 동생도 그렇다)


지금도 강압적이거나 수직적인 구조가 있는 환경이나 사람을 마주하면 PTSD가 온다.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 회사에서는 직속 상사의 존재가 늘 무섭고 강압적으로 느껴졌고, 실제로 위압적인 사람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학교나 회사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혼자 일하는 환경을 택했다.


예전에는

착한 것=나쁘고 재미없는 것

이라는 잘못된 신념도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 클럽이나 바에 가서 뒤집어지게 놀면서 성인 버전의 소소한 일탈을 즐겼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수줍다

술도 잘 안 마시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


나에게 어슴프레 해가 질 무렵 에너지가 넘치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친구들은 한 두 명 밖에 없었고


그 친구들과 가뭄에 콩나듯 만나서 놀았다


착한 건 안 좋은 거니까

일탈을 해야만 한다는 고장 난 신념으로

억지로 더 취하고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만취해서 벌어지는 무수한 흑역사와 함께

내 성격에 관한 의문점들이 생겨났다


“나는 나로 살면 안 되는 것인가?”로 시작하고


“내가 살고 싶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이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오한 물음으로 빠졌다


결국 제정신에도 잘 노는 한 두 명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그렇게 나의 소소한 일탈은 막을 내렸다


그러다 최근 근 10년 만에 예전에 한두 번 같이 클럽에 놀러 갔던 친구를 만났다


영어 자격증 공부하며 만난 친구였는데 나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재밌게 노는 친구였다


토요일

저녁 6시

이태원


뭔가 이미 재밌는 시간과 장소에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빡세게 꾸미고 만난 우리는

우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코로나 이후 아예 놀러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 흥이 오른 우리는

친구가 평소 가고 싶어서 저장해두었다던 라운지 바에 갔다


이태원 골목 뷰가 시원하게 보이는 루프탑 바였다.


위스키소다를 마시고,

흥겨운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 여기서 놀다가 갈까?”


마침 친구가 물어봐주니 나는 득달같이 그러자고 한다.


음악에 둠칫 둠칫 몸을 맡기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다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거린다

온갖 흑역사를 창출하며 알게   주량은 주종에 상관없이 (소주는 소주잔 맥주는 맥주잔 독주는 독주잔에 조금 따라주는 양만큼을 기준으로) 2잔이다

3잔부터는 다소 위험하다


이렇게 술도 조심히 마시니까 춤추기가 더욱 민망하다


날이 어두워지니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마치 코로나가 끝난 파티 분위기다


나는 그동안

착한 것=나쁘고 재미없는 것

이라는 프레임을

착한 것=적당하면 좋은 것

으로 고쳐먹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적당함이 아직 나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클럽에서 도져버렸다.


마크 주커버크를 닮은 프랑스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I’m a journalist.”

“I’m French.”


통성명도 하기 전에 자신의 직업과 국적을 말하는 그가 비호감으로 느껴졌다


어쩌라고


내 속의 자아가 외쳤지만

내 몸뚱이는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있었다


“So, what’s your name?”


그는 이름을 말하고 이내 자기가 MBC와 KBS를 비롯해 얼마나 큰 방송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의 자아는 어서 대화를 끝내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심지어 내가 할 줄 아는 프랑스 어를 구사하며 재롱을 떨고 있었다


멈춰…!!!!


결국 친구 핑계를 대며 대화를 끝내려는 찰나에 그가 카톡아이디를 물어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연히 그냥 안 알려주면 되는데


그러면 이 프랑스 기자가 상처받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나를 미워할 것 같고

그리하면 나를 미워하거나 실망한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이

덜컥 겁이 났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깊은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상대도 거절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모든 사람의 기대에 맞추려 하는” 나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설치는 것이다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고 도망치듯 친구에게 돌아오면서 현타가 왔다.


그리고 친구가 잠시 사라진 사이에 딱 봐도 갓 취직해서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남성분이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의 조카뻘이에요…’


죄책감을 느끼는 나의 자아가 외쳤다


“내가 네 이모다!! 왜 말을 못 해!!”


호통치는 자아를 뒤로하고, 나는 어느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취직한 회사에서 얼마나 심심한가에 대해 들어주며 상담을 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아 제가 친구랑 같이 와서요”하며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리액션 부자여서 그런지 그는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친구에게 나가자고 얘기하고 대화를 마치려는데 조카가 조심스레 연락처를 물어봤다


그리고 이번에도 알려줘 버렸다


이어서 또 다른 프랑스 남자와 비슷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근데 너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니?”


그의 통찰력 있는 질문에


“응”


이라고 대답했지만


‘대놓고 거절이나 싫다는 표현을 못해서 시간이 좀 걸려. 하지만 결국 싫은 거 싫다고는 해!!’


속으로 구차한 변명을 했다.


12시쯤 다행히 친구와 나는 집에 가기로 했고,

다음 날 연락처를 알려줬던 남자들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거절하는 방법’을 구글링 하기 시작했다.


유난스럽긴 하지만 오랜만에 해결해야 할, 나에게 주어진 꽤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졌다


예전에는 나름 거절도 하고 도망도 잘 다닌 것 같은데 이제는 너무 어렵다


열심히 구글링을 하며 알아본 ‘플러팅 상황에서 제 때 거절을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에 대한 고찰은 다음과 같다.


나의 습관성 착함은,


1. 상대로 하여금 호감이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할 수 있고,

2. 잘 돼가고 있다고 느끼던 상대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고,

3. 다른 사람들도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여겨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때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울 수 있고,

4. 모든 이에게 친절하게 응답하는 것은 나의 유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동이고,

5.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나의 가치를 낮추는 길일 수 있다.


오랜만에 어색한 환경에 스스로를 무방비하게 노출한 나는 멘탈이 탈탈 털렸다


클럽 같은 환경뿐 아니라, 평범한 하루의 일상에서도 나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드문드문 걸림돌이 된다.

고질병 같은 완벽주의와 번아웃도 거기에서 온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기꺼이 실망시킬 용기를 가지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 추구하는 가치, 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실망시킨 경험을 떠올려보았다.


중학교 때 지지리도 말 안 듣고 소소한 일탈을 했고,

잘 다닐 것 같은 대학교를 대차게 그만두고 삼수를 했고,

온 가족이 으름장을 놓으며 격렬하게 반대해도 초등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끝내 미국에 갔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직업을 선택했고,

전 남자 친구들에겐 큰 문제없이 헤어짐을 고했고,

주변의 성화에도 마땅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꿋꿋이 잘 버티고 있다.


상대를 실망시킨 결과들은 이렇다.


끝날 인연은 끝났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결국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구뤠!!!

나는 원래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할 줄 알고

거절할 줄 아는 여자야!!

잠시 어색하고 오랜만의 환경에 혼란스러워서 절었을 뿐야!!!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비롯해 많은 심리적 문제들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니


자신감이 생겼다.



4줄 요약

1. 나이 서른일곱에 플러팅 거절 연습을 하다니 나는 복 받은 인생이다
2. 클럽 한 번 갔다가 이 정도로 인생과 심리에 대한 고찰을 하는 나는 피곤한 의미충이다
3. 근데 앞으로 클럽 안 가서 구글링 한 거절법은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4. 막상 가면 아무도 말 안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수요 없는 거절 연습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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