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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Nov 14. 2022

사는 게 무엇인지

죽음의 거리를 체감할 때 어김없이 생각나는 주제


나는 어렸을 때 아파서 심장의 중요한 동맥들 중 하나의 일부가 좁아져 있다.


고등학생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흉통으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한 후 알게 된 사실이다.


얼마 전 여느 때처럼 밤을 새워 작업을 하다 심장부터 왼쪽 손끝까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저릿하고 뭉근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받아 그러겠거니 싶어 하던 걸 마저 한 뒤 잠에 들었지만 다음날에도 기분 나쁜 통증이 계속되었다.


치과에 갈 일이 있어서 집을 나섰다가, 이 통증도 의사 선생님의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씻은 듯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동네의 큰 내과에 갔다.


하얗고 파랗고 거무죽죽한 방에 들어가 증상을 말했다


선생님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심근경색인데 젊은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어디서 책을 많이 봤냐

검사해봤자 정상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자


하셨다


심전도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엑스레이는 이상이 없는데... 심전도가 이상하긴 하네요. 젊은 사람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 부분들이 올라가야 하는데 내려가 있어요."


심장에 중요한 동맥은 우측에 하나 좌측에 두 개 총 3개가 있는데, 우측에 있는 핏줄 하나의 결과가 이상하다고 하셨다.


이어서 피검사를 했고, 식도약(식도염과 혼동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응급  먹을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


'니트로글리세린. 위급     밑에 넣고 녹여드세요.  알을 먹었는데도 여전히 증상이 지속되면 즉시 응급실로 가세요'


빨갛고 굵은 글씨가 눈동자에 냅다 박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서 주는 거예요. 검사 결과 나오면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원래 심장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어서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병원 문을 나서자 덜컥 겁이 났다.


'심근경색 협심증 관상동맥질환 심혈관질환'

인터넷 세상 속 의사 선생님들의 고견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관상동맥이 꽉 막혀서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 심근경색인데, 6시간 내에 수술을 받아야 심장 근육 괴사를 막을 수 있고, 12시간을 넘기면 사망한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심각한 전조증상이 없고 어느 정도 심각해지면 엑스레이, 심전도, 초음파, 혈액검사에 잡히기 때문에, 보통 환자의 50%가 급사한다.


동맥이 막혔을 때 스탠트 시술을 받으면 되지만, 받은 뒤로 혈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약(스탄틴, 아스피린)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 부작용은 근육을 소실시킬 수 있고, 피를 묽게 해서 큰 사고가 나면 과다출혈로 위험할 수 있다.


당장 내일 죽는 건 아니고, 피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을 수 있지만, 살다 보면 좁아져있는 혈관이 터질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나 생각보다 일찍 갈 수도 있겠네.


죽는 건 운명일 뿐, 삶에 크게 미련은 없다고 무심코 말하던 나였다.

아플까 봐 무섭지만, 여전히 드라마틱하게 슬프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다만,


만약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죽기 직전에 가장 후회되는 게 뭘까

가장 하고 싶은 건 뭘까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다소 식상했던 물음들이 실감 나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버킷리스트를 적어 보았다

그동안 만들었던 리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진짜 하고 싶은 엑기스를 뽑아낸 듯한 리스트였다


생각보다 이건 진짜 꼭 반드시 하고 싶다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 주된 삶의 목표들 중 하나였던 성장, 성숙 이런 건 생각도 안 났다


할머니가 아프셨을 때 '얼른 나으셔서 하고 싶은 거 하셔야죠.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하고 물었을 때

하고 싶은 거 하나도 없고, 다했다는 할머니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이런 기분이셨을까 싶었다


가장 후회할 것 같은 일은 나 스스로를 싫어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한 일이다

뭐 그거 좀 잘 못하거나 못나면 얼마나 어떻다고 그렇게 못살게 굴고 타박을 했나 싶었다

길수도 짧을수도 있는 남은 기간 동안은 느려도 잘못해도 실수해도 실패해도 그냥 잘했다 재밌었다 기특하다 해주고 싶다


앞으로는 더욱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지만,

나는 짧은 인생 동안 필사적으로 하기 싫은 일을 피해 다녔고, 아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 땐 가더라도 할 건 해야지?


오늘도 유튜브 영상을 준비하고 사무실을 오픈할 준비를 하면서 즐거웠다.


앞으로는 더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나 하고 싶은 거 더 많이 하면서 살아야지.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자한 할머니가 되는 게 목표였는데, 인자한 젊은이부터 되어야지.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사랑하는 하루하루를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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