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8
민익씨의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이따가 인도어 락 클라이밍(실내 암벽등반) 갈 건데, 같이 갈래?”
그의 가족들에게는 전형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민익씨의 특징도 있다.
“젠, 실내 락 클라이밍 갈래?”
그의 아버지가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한국사람과 가장 비슷하다는 이탈리안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한 핏줄인데도 둘은 성향이 많이 다르다. 민익씨는 일급수에만 사는 물고기가 살 것처럼 맑고 잔잔한 호수에 느긋이 떠있는 돛단배 같은 반면, 그의 아버지는 성미가 급하고 불같은 데가 있다. 일톤 트럭을 매단 포클레인 같다. 왠지 그를 기다리게 만들면 화를 내실 것 같다. 제안을 고려해 볼 여유가 없다. 내게 주어진 대답할 시간은 약 2-3초.
“음... 그... 그럴까?”
“오케이. 젠도 간대요. 갈게요.”
우리는 주말마다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가족 행사에 참석해왔다. 그의 가족들은(사실은 그의 새어머니가) 이벤트를 많이 만들어 매우 자주 만난다.
언젠가는 느닷없이 목요일쯤에 본인들이 주말에 여행을 가니 집에 와서 민익씨의 동생들을 봐달라고 했다. 그들은 9살, 11살이다. 나에겐 평일에 노예처럼 일하고 대가로 모처럼 쉴 수 있는 주말인데 민익씨의 동생들이 귀엽긴 하지만 그렇게 아무 때나 불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났다.
우리는 결국 동생들을 봐주러 갔고, 그들은 밤 10시쯤 오겠다고 해놓고 새벽 2시가 넘어서 왔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하면 안 되는 건데, 남자 친구의 가족들에게 불편한 내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일은 그 후에 한 번 더 반복이 될 뻔했다. 그의 동생을 돌보다 부모님이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자, 나는 그냥 혼자 택시 타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민익씨는 당황해서 자기도 가겠단다. 그럼 애는 누가 보냐고 했더니,
“닉이 보면 돼.”
민익씨의 바로 밑 동생 21살 닉은 민익씨 아버지 집에 함께 사는데, 동생들을 돌보는 베이비 시팅을 매주가 멀다 하고 한단다. 이번 주에는 쉬나 보다 했는데 내가 집에 간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가 다시 강제 소환되었다.
닉에겐 미안했지만 여전히 그의 부모님의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주시면 좋으련만. 모처럼 침대에 편히 누워서 뒹굴거릴 수 있는 내 주말이 의무감으로 뒤덮여 사라지는 기분이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부모님의 아이들을 봐주는 일은 업무로 느껴진다.
특히 민익씨의 새어머니는 민익씨에게 ‘형제들 중에 가장 아이들을 맡길만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브랜딩을 하며 그에게 자주 베이비 시팅을 부탁한다.
‘저 정도로 주말을 자주 비우면 그냥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지.’
그의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워낙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주말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힘든가 보다. 난 아직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둘이서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처지라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민익씨의 친어머니는 한 말을 꼭 지킨다. 반대로 안 지키는 사람을 아주아주 싫어한다. 아버지와 헤어진 것이 이해가 간다.
나는 처음에 두 분이 이혼한 이유가 새어머니 때문이었는 줄 알았다. 내가 바람이나 외도에 거부감이 있는 데다, 수시로 베이비시터를 부탁하는 문제로 나는 한동안 민익씨의 새어머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혼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그저 새어머니가 있다는 이유로 어림짐작을 한 것이다. 나중에서야 두 분이 ‘성격 차이’로 헤어진 것을 알았다.
그들이 갑자기 불러대는 가족 행사에 나는 적절한 의상을 갖춰 입고 간 적이 별로 없다. 미리 알았다면 화장품이라도 더 챙겨 오고, 옷이라도 더 단정하게 입었을 텐데. 쌩얼에 쭈굴쭈굴 다 구겨진 티셔츠, 혹은 가족을 만나기에 다소 섹시(?)한 옷차림을 입고 그들을 만나기가 일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스터 해맑음 로봇 민익씨는 늘 괜찮다며 나를 가족들에게 데려가려 한다. 이번엔 실내 암벽등반이다. 다행히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우리는 이내 민익씨의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민익씨의 아버지는 굉장히 로맨틱하고 섬세하다. 내가 가면 물 줄까, 맥주 줄까, 뭐 먹을래, 이건 어떠니 끊임없이 물어보고 내 기분이 괜찮은지 확인한다. 세상 스윗한데 그렇게 꼼꼼할 수가 없다. 아무리 성미가 급하고 성격이 불같아도 이탈리안이 매력적인 남성상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락 클라이밍장에 도착하니 대니, 마이클(베이비 시팅의 주인공들, 너무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인데 주말에 봐줄 만큼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미안할 뿐이다 ㅠㅠㅋ), 미셸(민익씨의 새어머니), 미셸의 어머니와 새아버지, 민익씨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커플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락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은 대니와 마이클, 그리고 우리 커플이었다. 우리는 민익씨의 아버지 가족이 실내 암벽 등반을 즐기는 이벤트에 무임승차를 한 것이다.
얼마 전 베이비 시팅 부탁을 거절해서 미안한 마음에 혼자 눈치를 보고 있는데, 민익씨는 스파이더맨이 따로 없다. 온 벽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의 발자취를 찍는다. 팔에 힘이 얼마나 센 건지 ㄱ자로 꺾여있는 절벽에서도 대롱대롱 매달려서 위로 올라간다.
나도 그의 철면피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기왕 온 거 재밌게 놀다 가야지!!’
다들 밑에서 지켜보고 있어 민망했지만 꿋꿋이 비교적 쉬운 코스에 정상을 찍었다. 내려올 때는 발로 차면서 절벽에 몸이 닿지 않게 내려와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수직으로 몸을 질질질 끌고 내려왔다.
미셸의 새아버지는 동양인을 처음 보셨는지 내게 궁금한 게 많으셨다. 질문도 많이 하시고, 챙겨주시고 따뜻하고 다정하다. 나는 할아버지들에게 비교적 많은 사랑을 받는 캐릭터다.
락 클라이밍을 마치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 그의 새어머니 미셸과는 도통 대화가 없다. 그녀는 말이 매우 빠르고, 목소리가 크고, 친구가 많은 아주 외향적인 성격이다. 나와는 다르다. 부탁을 몇 번이나 거절한 내가 밉지는 않을까. 다소 걱정이 된다. 비교는 죄악이지만, 민익씨의 친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 훨씬 정감 가고 좋다.
민익씨의 친어머니가 나를 대하는 따뜻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배다른 자식이라 그런 걸까? 나이가 친어머니보다 훨씬 어려서 그런 걸까? 아님 그냥 성격일까? 그저 내가 예민한 걸까.
미국은 연애시절부터 상대방의 가족을 알아가기에, 결혼을 해서부터 가족과의 결합이 시작되는 우리나라에 비해 장단점이 있다.
다소 편하지 않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은 나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이어가게 될까.
잘 지내면 아무래도 좋겠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