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장거리 연애는 처음이라 ep.5

장거리 연애의 치명타 (2)

by 뉴욕꼬질이들



민익씨에게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버릇이 있다.


“내가 이따 밤에 전화할게.”


“응, 알겠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강아지가 현관문을 바라보듯 나는 그가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면 현관문 대신 핸드폰을 자꾸만 확인한다.


오늘은 전화가 없네.’


민익씨는 90퍼센트 정도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만 10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내게 한 말들을 어긴다.


그 이유는 주로

피곤해서, 친구나 가족을 만나 술을 마셔서, 급한 일이 생겨서 등이다.


연애관계에서 신뢰란 저금통 같아서 믿음이 한 닢 한 닢 쌓일수록 든든한 보증수표가 된다.


나는 누군가로 인해 보증 수표를 발권하는데 약 1년에서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저금통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던 연애 초반에는 그에게 연락이 없으면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사고라도 났나?’


혼자 온갖 상상과 망상 속에서 헤엄치다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민익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는 목소리로 돌아온다.


그럼 나는 역시나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쿨한 척을 한다.


어차피 주말에 만난다는 생각은 내게 그의 평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를 주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통화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그 유일한 수단으로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언질도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난다.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을 안 하나?!’


90퍼센트는 꾸준히 연락을 한다는 점에 포커스를 다시 맞춰본다. 이밖에도 민익씨에게 감사할 일들을 소소하게 찾아내 종이에 적어본다. 여전히 울화가 치민다.


처음 몇 번은 그냥 넘어갔다.

나 또한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연애를 할 때 남자 친구였던 누군가는 내가 연락이 너무 없다고 불만이 많았다.

굳이 만나서 이야기하면 될 것을 문자나 전화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 꺼려졌다.

나는 전화를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끊어야 할지 등에 대해 쓸데없이 고민하는 전화 포비아 같은 것이 있어서, 심하게 내킬 때가 아니면 전화를 반갑게 느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민익씨를 만나고부터는 그의 전화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장거리를 시작하고 나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와 함께 나누는 일과가 너무 자연스럽게 내 삶에 들어와 버렸다.

이전 나와 만났던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하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은 기억도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연애 애착 유형이라는 검사가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인간관계에 있어 어떤 애착 유형을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어릴 때 부모로부터의 양육방식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애착 유형은 크게 불안형, 안정형, 회피형의 세 가지로 나눈다.


불안형은 혹시나 상대방이 떠나갈까 봐 불안해하고, 질투도 많은 편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사랑을 하는 유형이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할까 봐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거나, 상대가 떠나갈 때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될까 봐 질투를 하는 등의 경우다. 예상한 대로 자존감이 높지 않은 유형이다. 부모가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특징이라는데, 감정 기복이나 변덕이 심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안정형은 말 그대로 안정형이다. 내가 정서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상대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사랑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도 아는 안정적인 정서 관계를 형성할 줄 아는 유형이다. 당연히 부모로부터 안정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경우다.


회피형은 불안형의 또 다른 버전이다.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피해버리는 스타일이다. 우리 이야기 좀 해 라고 말을 꺼냈을 때 한숨을 푹 쉬며 방에 들어가 버리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거나, 혹은 관계에 있어 누군가가 나의 생활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침범당했다고 느끼는 유형이다. 어릴 적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외면하거나 비난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경우다.


사람의 정서란 단순히 삼분법 적으로 나눌 수 없기에 이 세 가지 유형은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려서 부모님의 싸움을 자주 보고 자랐다. 언젠가는 두 분이 이혼하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쌓여 지냈다.


그 이유에서인지 내가 스스로의 연애사를 바탕으로 판단했을 때 나는 ‘심각한 불안형+회피형’이었다.

남자 친구에게 걸핏하면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의 본질은 그가 싫어져서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였다.

관계를 아름다운 상태에서 멈춰두고 싶었다.

박수칠 때 내려오라는 유명한 그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내 연애를 박수칠 때 멈췄다.


20 중반에심한 안정형 연애를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바르게 자란 그 또한 내게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노이로제 수준에 가까운 나의 연애 롤러코스터에 합승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사람의 애착 유형은 일생에서 본인과 깊은 애착관계를 맺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뀔 있다.

결혼까지 생각하게 해 준 내 전 남자 친구는 내게 사랑의 진면목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연애가 항상 아름다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연애를 통해 심각한 불안+회피형을 벗어나, 약한 불안+회피+안정형이 되었다.

결국은 미국에 유학을 가겠다고 그를 떠났지만 말이다.


연애 이론 학사급인 내가 충분히 지켜본 민익씨의 경우 ‘약한 회피+안정형’이다.

그는 개인의 공간을 중시하고, 자신의 공간을 지나치게 침범해 다가오는 경우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연애 초반에 그와 친하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 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조금 친하구나.’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불안형과 회피형은 서로 상반되는 유형이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를 갉아먹는 좋지 않은 관계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 두 유형은 서로에게 자석처럼 끌린단다. 예전의 나와 민익씨가 만났다면 우리는 아마 진작에 헤어졌을 것이다. (민익씨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 또한 약간의 회피 성향이 있어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민익씨가 의도치 않게 거리를 둘 때 최대한 그를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아주 약한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지냈다. 민익씨 또한 자신의 역량에서 할 수 있는 정도의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이렇게 만유인력법칙급의 분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장거리가 시작되고부터 점점 내 눈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우리 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다.


함께 있을 때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다가도, 주말이 와서 그와 정신없이 신나게 놀다 보면 그런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생각할 시간이 있다. 아니, 너무 많다. 그래서 별 일 아닌 일에도 크게 확대해석을 하며 자꾸 우리의 관계에 대해 되돌아보곤 한다.


“왜 전화를 한다고 하고 안 해?”


“응. 미안해. 그 날 친구를 만났어.”


“기다렸잖아... 그 전에 뭐라고 간단히 말이라도 해주면 안 돼?”


“그래야 했는데. 미안해.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


꼭 이럴 때는 ‘대답의 정석’ 책을 완독 한 학생 같다. 얄미울 정도다.


“알겠어.”


그러고 나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별 일이야 있겠거니 하고 그를 믿기로 한다. 그가 걱정된다는 것을 빙자한 내 욕심 채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가 나기도 하고, 혼자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그러다 말기도 하고, 가끔은 따지기도 한다.


대답의 정석을 독파한 학생에겐 따져도 답이 없다.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칭찬은 칭찬받아 마땅한 시점이라면 자주 할 수록 좋지만 바가지 긁는 것은 적정선을 넘으면 안 좋다. 자칫하면 행동을 교정하려다 되려 문제행동을 강화하게 된다. 배워둔 아동심리가 묘하게 연애애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2주년 기념일이 왔다.

함께 있을 때는 내가 수시로 그에게 기념일이나 내 생일이나 이벤트가 필요한 날을 미리 틈날 때마다 공지했다. 현재 우리의 카톡방 공지도 우리가 사귀기로 한 기념일이다.

기념일을 챙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가끔 왕무심한 민익씨가 혹시라도 까먹으면 내게 생길 서운함과 분노 폭발을 진작에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장거리 커플이 되고 나서 맞는 2주년 기념일은 미리 알려주고 싶지 않다. 내가 알려주지 않고도 그가 과연 기억을 해낼까 궁금하다. 이번에는 일부러 말해주지 않기로 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익씨는 그 날 본인의 남동생 닉, 그리고 친척인 저스틴(눈물로 얼룩진 크리스마스- 방탈출 게임 편 참조)과 ‘식스 플래그(Six Flags)’라는 놀이공원에 간다고 신이 났다.


식스 플래그에는 다양하고 무서운 롤러 코스터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민익씨에게 같이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나랑은 안 가고 이제 와서 가족하고 간다. 1차로 한이 쌓인다. 조짐이 좋지 않다.


“재밌게 놀다 와.”


오늘 기억하긴 글렀군.


대략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스펙타클한 일정을 잡을 줄은 몰랐다.


‘오늘 우리 기념일이지? 축하해.’


꽃다발이나 선물까지 바라지 않는다. 그저 기억하고 있다는 짧은 문자 한 통이면 내 마음을 사르르 녹여줄 텐데.


민익씨는 핸드폰을 자주 확인한다. 폰으로 캘린더의 일정 관리도 하고 메일도 확인한다. 그의 핸드폰은 그가 정한 일정에 따라 수시로 알람이 울린다. 부디 날짜를 자주 확인하며 우리의 기념일을 깨닫기를 바라 본다.


밤 12시가 지나가기 직전 나는 뚜껑이 열렸다.

우리의 기념일은 시차가 있기에 나는 이미 한국 기준의 기념일을 넘기고, 미국 기준 기념일까지 기다렸다. 머리에서 연기가 난다.


웬만해선 먼저 걸지 않는 전화를 다짜고짜 건다.


“Hey, honey.(응, 자기야.)”


그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는다. 운전 중인 듯하다. 민익씨의 목소리 너머로 닉과 저스틴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그에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 그러다 갑자기 김이 펄펄 나는 밥솥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것 마냥 차갑게 식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제일 무서운 질문을 시퍼렇게 던진다.


“응? 무슨 날이지? 음...뭔데?”


태연하게 그가 묻는다.


풀이 죽은 채로 대답한다.


오늘 우리 2주년 기념일이야...


갑자기 민익씨의 주변에서 야유와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차의 뚜껑이 아까 내 머리 뚜껑처럼 열렸으면 좋겠다.


닉과 저스틴이 나 대신 실컷 원망해줬다.


“허니, 진짜 미안해. 내가 집에 가서 연락할게. 근데 지금 차가 막혀서 아직도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수도 있어.”


민망함과 미안함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사실 그는 오늘도 밤에 전화한다 해놓고 나를 기다리게 했다. 내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어버렸을 것이다.

원망과 원성을 혼자 삭히며 나머지 하루를 보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닉과 저스틴이 곁에서 풍부한 호응을 해줘서 그나마 마음이 조금 낫다.


약속한 대로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건 민익씨에게 나는 네 죄를 알렸다 호령하며 사또 행세를 했다.


진짜 미안해. 내가 이번 죄는 갚을게. 갖고 싶은 있어?”



“꽃 배달받고 싶어. 나 유튜브 할 때 마이크도 필요해. 좋은 거로 봐둔 거 있는데 링크 보낼 테니까 그걸로 주문해 줘.”


예정에 없던 선물들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나무늘보가 울고 갈 대답의 정석남도 이번에는 본인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내가 요구한 사항들을 24시간 내로 실행에 옮겼다.


성질 급한 약한 불안+안정+회피형의 아주 복잡한 한국 여자는 오늘도 마음에 ‘참을 인’을 가로 새긴다.










그가 보낸 보라색 장미랍니다. 기념일 날짜가 지나서 상한 거 같다고 당당하게 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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