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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Jan 12. 2024

시력의 역주행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Op.35 #몰입과 집중

예민한 사람이 무던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자 카운슬러가 말하기를 그 예민함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어떤 것에 집중하면 된다고 했다. 예민해서 다른 것들에 온통 신경이 쓰여 집중을 할 수가 없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리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집중이 주는 효과에 대해 새삼 느낀 요즘이었다.


노안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 시력 1.5, 가끔 넘겨짚어서 잘 맞으면 2.0 가까이도 나오던 시력이 차츰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 동반되는 변화들이 있었다. 어디 눈만 그럴까. 전반적인 체력도 이전보다 좋지 않지만 워낙 운동 신경과는 거리가 먼 저질 체력이었기에 큰 불편함을 못 느끼는데, 시력은 계속 좋은 상태로 지내다 보니 갑자기 찾아온 노안은 마음까지 흐려지게 만들었다. 돋보기안경을 맞췄는데 책 볼 때 쓰면 시력을 회복한 듯 맑고 또렷한 글자가 펼쳐지는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잠시, 코 위에 무언가 있다는 이물감이 영 불편해서 집중이 안 된다. 최적의 상태로 잘 거치해서 글자를 보면 이번에는 울렁거리는 문제가 생긴다. 눈을 쉬려고 돋보기안경을 벗고 있다가 다시 글자를 보면 다시 이물감을 느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맨눈으로 보려 하니 미간을 찌푸리게 되고 분산되는 글자에 집중력이 떨어져 결과적으로는 글자를 가까이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처음 이런 증상이 온 게 4년 전인데, 그때 계단식으로 뚝 떨어지고는 적응하며 버티다가 작년 겨울, 또 한 번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번에는 약간의 우울함도 찾아왔다. 그러다가 마음이 급해졌다. 나중으로 미뤄둔 많은 일들 가운데 글자를 봐야 하는 일을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 떨릴 때 가는 거라며 노후 여가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즐기라는 말도 있는데, 나의 감성으로는 다리가 떨릴 때 가슴도 여전히 떨릴 것 같아서 오히려 미뤄도 될 듯싶었다. 그래서 연말을 지나 새해를 맞이하며 버킷 리스트, 의무 리스트를 재편했다. 더 이상 ‘나중’이라는 여지를 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이든지 현재, 지금, 당장이다. 시력 하나만으로도 제약이 이렇게 심해지는데 앞으로 이런 조건들이 더 많이 생길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떤 것을 시작했다. 그리고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공부를 시작했다. 미뤄둔 여러 공부 중에서 이 과목이 간택된 이유는 마침 그때 듣고 있던 한 뮤지컬 넘버가 너무도 멋있고 강렬하게 들려서다.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부터 지금까지 3주간 이 공부에 빠졌는데 정말 재미있게 몰입하고 있다. 그런데 돋보기안경 없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제 깨달았다. 인강도 보고, 교재에 메모도 하고, 공책에 필기도 열심히 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안경을 안 썼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까지 공부하는데 아무런 시각적 제한을 못 느꼈다. 시력도 세월에 역주행이 가능한가 보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 이내 눈이 뻑뻑하고 시린 느낌이 많이 들곤 했는데, 지금 인강 진도에 의하면 노트북 보는 시간이 결코 적은 게 아닌데 불편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교재에 있는 글자도 매우 작다. 그런데 인강 내용을 받아 적는 동안 한 번도 작다는 생각을 못 했다. 심지어 교재 글자에 맞춰 잔글씨로 메모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노트를 펼쳐봤다. 정말 신기한 현상을 목격했다. 첫 장부터 오늘까지를 보니 글자 크기, 자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한 페이지에 적는 내용이 첫날에 대비해 지금은 1/3은 더 늘어났다.


그러다가 떠오른 문장과 음악이 있다. 문장은 서두에 쓴 것처럼 예민함을 뛰어넘는 집중력이었다. 돋보기의 부작용은 이물감, 울렁거림 이외에도 많았다. 책상 위 먼지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통에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청소하고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이 모든 게 부족한 집중력에서 오는 핑계였다. 이런 것들이 있기에 집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집중을 안 하니까 다른 것들이 다 방해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몇 년 간 불편함을 겪다가 맨눈으로 글자를 보는 것의 자유를 만끽하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보며 공부해야 하는 되도록 많은 것들을 앞당겨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강해졌다.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기분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신체의 기능들에 대해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도 덤이다.


이 벅찬 감동에 어울리는 선율이 있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작품 번호 35번이다. 1악장이 전개되다가 6분을 지나면서 오케스트라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짜릿함과 비슷한 감정이다. 재미있게도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곡을 쓰면서 자신의 음악적 영감은 지금 절정에 도달했으며 불타는 열정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1878년 3월 17일에 작곡을 시작하고 이틀 후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작곡에 몰두하고 있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던 차이콥스키는 25일 만인 4월 11일에 이 곡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 곡이 세상의 빛을 보고 유명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는 결혼 생활에서 파경을 맞고 큰 상처를 받아 스위스의 한 리조트에서 요양을 하던 중에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게 되었다. 그의 슬픔과 상처를 잊고자 몰입했던 대상은 작곡이었고,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집중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예술가는 슬픔의 반동조차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하다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노안이 준 불편함은 일종의 경고이자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자원과 기능, 시간이 무한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지금, 현재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1악장의 좋아하는 파트만 주로 듣던 바이올린 협주곡을 오늘은 전 악장 모두 감상하고 싶다. 차이콥스키의 영감과 몰입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 25일 동안 그가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 나는 25일간의 몰입으로 인생에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남길 수 있을지도 영감을 받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VMov701K_7A

Ray Chen,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https://www.youtube.com/watch?v=cbJZeNlrYKg

Joshua Bell,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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