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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May 20. 2024

발표를 듣는 심사위원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운도 능력이라는데 #불후의 명곡에서 우승하려면 몇 번째 순서가 좋을까

비행기는 이륙 후 5분, 착륙 전 8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발표에서도 도입과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특히 도입에서 청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앞에 있는 발표자는 차라리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무대공포에 떠는 게 낫다 싶을 만큼 애가 탑니다. 발표는 대체로 목적이 있는 스피치이기 때문에 청중은 발표에 기대하고 집중하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발표자를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지루해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제안서를 미리 휙휙 넘겨보는 심사위원들도 간혹 있지만 발표를 기대하고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들의 이러한 집중과 몰입을 발표자가 계속 이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발표를 듣는 청중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세요. 전략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고려해야 것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앞에 나가서 슬라이드에 적힌 대로 읽고 내려와도 그만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발표를 잘하고 싶은 거잖아요. 발표의 목적도 성공적으로 이루고 싶고요. 그런데 세세한 부분을 챙기다 보면 질문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 인사할 때 말 먼저인가요, 아니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서 말을 하나요? 아니면 바로 시작하나요?

- 태블릿, 빔 포인터, 마이크를 두 손에 어떻게 들고 발표하나요? 

- 무대에 올라갔는데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돼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면 어떻게 하나요?

- 외워서 하는 게 더 멋있지 않나요? 보고 읽으면 준비한 성의가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요?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을 얻는 방법은 청중의 입장이 되어 발표를 경험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발표에 도움이 되는 것과 방해가 되는 것들이 바로 정리될 거예요.  


특히 같은 주제로 비슷한 발표를 여러 번 들어야 하는 청중, 대표적으로 심사위원은 어떤 마음일까요?


경쟁 입찰에서 발주자가 가장 궁금한 것은 '기간, 품질, 비용'입니다. 좋은 품질로 짧은 기간 동안 합리적인 비용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업체를 선호합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6개사의 제안을 발표로 직접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발표를 통해 제안서를 보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질문하고, 전략의 타당성도 확인합니다. 제안서에는 담지 못한 추가적인 내용도 듣고 싶습니다. 발표자를 보며 회사 분위기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업체들이 차례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이때, 언제 발표하는 회사가 유리할까요?


발표를 들으면서 심사위원은 점점 학습이 됩니다. 잘하는 회사의 역량은 더욱 돋보이고, 못하는 회사의 약점도 뚜렷하게 보이며 편차가 커집니다. 


첫 번째 발표를 들을 때는 심사위원들의 집중력이 날카롭게 살아 있습니다. 발표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제대로 잘 준비했다면 오히려 좋습니다. 시장 현황, 마케팅 전략, 리스크 관리 등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들으면서 부지런히 메모하고 질문도 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회사가 들어옵니다. 시장 현황을 또 듣자니 재미가 없습니다. 사실 시장 상황, 업계 현황은 프로젝트를 발주한 회사도 잘 아는 데다가 방금 첫 회사의 발표를 들으면서 새로운 부분도 보충했습니다. 또 듣자니 지루한데 한편으로는 짚어야 할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 회사는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업계의 상황 파악도 스마트하게 하지 못하는 회사가 제시하는 전략과 업무 방식에 의문이 생기면서 발표를 듣는 정서가 다소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니 지루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는 회사는 불안합니다. 


질문이 점점 날카로워집니다. 앞서 회사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학습이 되었기 때문에 아는 게 많아져서 새로운 발표가 흥미롭기보다는 지루합니다. 다른 회사 얘기를 들어보니 안 되는 거라던데 이 회사는 된다고 합니다. 경쟁력, 차별점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잘 모르고 제안하는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도 듭니다. 


오전 발표의 수준, 점심시간, 심사위원의 개인적인 심기와 컨디션도 변수로 작용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는 '실력'입니다.


점심시간입니다. 오전 세 팀 중에 마음에 가는 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처음에 평가의 기준이 서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기에 오후에 들어오는 팀들은 이 부분을 운에 맡겨야 합니다. 심사위원으로 불려 왔지만 하던 업무는 그대로이기에 오전 내내 밀린 메시지와 메일이 점심시간 동안 계속 울려댑니다. 일해야 하는데 오후에 들어야 할 발표가 또 있습니다. 오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회사가 있다면 오후에 들을 의미가 없으니 귀찮아지고, 오전에 모두 기대 이하였다면 오후에도 또 그럴까 봐 우려와 짜증이 올라온 상태에서 발표장에 들어섭니다. 


현장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센스도 발표자의 능력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안서에서 궁금한 것만 서너 개 물어보면 판단이 설 것 같은데 20분씩 똑같은 얘기를 세 번 더 들어야 한다니 흥미는 이미 강 건너갔고 집중이 안 됩니다. 오전에 듣던 20분과 오후에 듣는 20분의 체감 시간은 확연히 다릅니다. 점심시간 직후에 들어온 네 번째 회사가 있습니다. 슬라이드가 제대로 안 열리고 오류가 납니다. 발표자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스크립트를 보면서 읽는데 자기네 회사 이름 소개하면서 버벅거리다가 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인사를 꾸벅하고 도입을 이어가는데 이미 정신줄을 놓아버린 발표자는 또 틀립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를 또 하고 이어서 말하려 하니 심사위원 중 성격 급한 사람이 참다못해 말합니다. "다시 안 하셔도 되고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셔도 됩니다." 


발표자의 역할은 발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이 회사를 선택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때 신속하게 반응을 하면 되는데 융통성 없는 우리 발표자는 고지식하게도 준비한 대로 안 하면 큰일 날까 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뭉기적거립니다. 이미 심사위원들의 마음속에서 이 회사는 아웃입니다. 그래도 기회의 공정성을 위해 계속 발표하게 둡니다.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반전은 없을 것 같은데 이 시간에 차라리 밖에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하며 식곤증을 물리치고 싶어집니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열고 들어온 메일들을 열어봅니다. 카톡에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합니다. 심사위원의 매너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5%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당신의 등장으로 지루한 회의실과 답답한 심사위원의 마음에 빛을 안겨주세요. 


서류 심사는 통과했으니 다들 비슷한 레퍼런스를 가진 회사 소개, 자다가 환청이 들릴 것만 같은 시장 상황의 반복, 업계 표준대로 작성한 업무 절차, 누구나 방어하는 리스크 관리가 이어지는 네 번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이제 두 개만 더 들으면 됩니다. 남은 회사들은 아예 못하거나 화끈하게 잘해서 결정이라도 쉽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도토리 키재기를 하려니 선발하는 명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번째 회사입니다. 발표자가 웃으면서 씩씩하게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품위 없이 오버하지도 않습니다. 오후 2시, 누구에게나 지루한 시간인데 이 사람의 분위기에서는 아침 9시에 갓 내린 신선한 드립 커피 향이 납니다. 슬라이드를 띄우며 발표 준비를 하는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고, 기분 좋은 일을 앞둔 사람처럼 밝은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17분의 발표 후 10분간의 질의응답을 마치고 발표자는 퇴장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여기네, 여기. 아, 다행이다." 발표자는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요?  이어서 마지막 여섯 번째 회사의 발표와  질의응답까지 끝났습니다.


모든 제안 발표를 들은 심사위원들은 잠시 커피 브레이크를 갖고, 다시 모며 회의를 진행한 뒤, 최종 선발 업체를 정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업무 보고 후 업체를 확정합니다. 합격 통보를 받은 회사는 어디였을까요?


운을 통제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KBS  음악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는 공을 뽑는 MC의 손을 바라보는 대기실 출연자들의 긴장된 얼굴이 매번 클로즈업됩니다. 1번은 누구나 피하고 싶고, 강력한 우승 후보 다음에 비교당하기 싫고, 이미 잘하고 못하는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가 어느 정도 우열이 가려진 마지막 순서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승 트로피를 가져갈 수 있는 골든 넘버는 과연 몇 번일까요?


무대 울렁증은 타고났고, 준비하는 것도 귀찮고 연습도 안 하면서, 남들 하는 것에는 이러쿵저러쿵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입니다. 발표를 쉽게 보고 노력도 안 하면서 발표하는 그 순간에만 스티브 잡스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답이 없어서 코칭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느낀 다양한 요소들을 나누면서 누구나 부담 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잘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방법들은 대단한 전략도 전술도 아닌 그저 작고 사소하게 챙기면 좋은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발표의 목적과 설득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 큰 그림을 꼭 마음에 품어주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다섯 번째 회사의 발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시간을 통하여 발표에 임하는 마인드를 잘 탑재하셨으리라 생각하고 다음 시간부터 작고 사소한 기술,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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