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말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시대에 방영된 캔디캔디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지나치게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내게 이해불가였고,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직진하지 않고,
소통 없이, 홀로 고민하여 이상한 선택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빨강머리 앤은 왜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지만 남아 있는 빨강머리 앤의 스토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며칠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일부러 찾아서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불편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들오들 떨면서 입양되기 바라는 빨강머리 앤의 그 절실한 눈빛과,
끊임없이 조잘대어서 상대가 질릴 때까지 떠들어대는 불안함에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지나치게 사과하고, 지나치게 화를 내고, 지나치게 자책하는 모습까지
앤이 가진 그 많은 부분들이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빨강 머리도 아니고, 주근깨도 없고, 고아는 더욱 아니지만,
환영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사소한 일에도 상처 받아 발끈하는 마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였고,
먼저 화를 냄으로 자신을 과잉 방어하던 빨간머리 앤의 마음이 가득 있었다.
사실,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굳이 풍진 세상까지 나가지 않아도,
조그마한 가정 내에서부터 홀로 불안하고, 무섭고, 쓸쓸하고, 외로우니까.
만화보다 영화는 풍성한 풍경으로
빨강머리 앤이 기차역에서
새 가정이 자신을 데리러 올 때를
기다리며 바라본 나무부터,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앤을 집으로 데리고 가는 길가의 모습들이 묘사하고 있다.
매튜아저씨와 앤이 단둘이 집으로 가는 길들.
그 길 위에서
정신없이 계속 말을 내뱉었던 이상한 아이 앤은,
계절과 풍경이 오가는 일상을 만나고,
매튜아저씨가 맨날 보았던 그 풍경이
동행한 앤과 느낌을 나누면서
빨강머리 앤으로 변하게 된다.
발음상 차이는 없으나,
꼭 e를 끝에 붙여야 하는 그 빨강머리 앤으로 말이다.
우리 모두는 환영받기를 원하였으나,
예상과 다르게 태어났을 것이고,
기대와 다른 우리를
집안으로 들이고,
길러내며 함께 보낸 일상이 있다.
그 구비구비마다 함께 했던 서사들이,
나누었던 감정들이,
처음 느꼈던 이질감과 서운함을 잊고,
가족으로 이어지게 하지 않던가.
이해할 수 없는 일과
사람들에 대한 용납과 포용을 낳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늙으나 젊으나 빨강머리 앤 이고
오직 끝에 e가 붙어야 할 서로의 관계의 역사만이 필요할 뿐이다.
글을 쓰다가 빨강머리 앤에 시큰둥했었는지 기억이 났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노래 가사가 문제였다.
예쁘다고, 다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우면, 무조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