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말이다
워싱턴 디씨에 가 볼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는 글에
어느 분이 이곳을 언급하셨는데,
워싱턴디씨를 많이 드나드는 저도 잘 모르는 곳이였습니다.
그래서, 휴일을 맞아서 아이들을 몰고 다녀왔습니다.
1882년 조미통상조약이후 1888년 박정양공사가 미국에 파견됩니다.
이곳은 1889년에 조선이 처음으로 공사관을 연 곳입니다.
원래는 펩브스라고 하는 남북전쟁의 유명한 영웅이 자신이 살 집으로 만불을 들여서 지은 저택이었습니다.
3년정도 이곳에 세들어 살던 조선제국은 이 건물을 2만5천불에 펩브스에게서 구입합니다.
2만5천불은 당시 조선정부의 일년예산의 반이상의 금액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공사를 비롯한 공사관직원가족들이 다 같이 머물렀는데,
최초로 미국에 온 한인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아이
그런 모든 종류의 최초의 역사들이 일어 나는 장소였습니다.
최초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기때 숨졌는데, 근처에 있던 펩브스씨의 가족묘지에 매장되어 있다고 하니,
이 장소의 원주인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든듯 싶습니다.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공사관으로 임무를 16년정도 지속적으로 하다가,
1905년에 을사조약이후 업무를 강제 중단하게 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후에는 건물이 강제로 팔리게 됩니다.
단돈 5불에 일본인에게 팔리고, 그 며칠후에 어떤 미국인에게 10불에 넘겨집니다.
서류상에 남아 있는 액수가 터무니없이 적은데, 뒤에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추측에 의하면, 빨리 이 건물의 소유권을 조선과 일본에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의지가 있었고,
그 뒤에 무슨 거래가 오고갔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후 이 건물은 자선단체의 소유로 있다가,
2012년 대한민국의 문화재청이 한화로 약 40억(3백*십만불)다시 사 들일때까지는
한 가족이 40년동안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덕에 이 건물은 이 외교관저들이 수두룩한 이 거리에서
19세기 말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현관을 들어 갑니다.
1층은 당시의 사진자료가 남아 있어서, 그대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태극기도 저리 걸려 있었고, 모든 가구배치며 인테리어 소품까지 저 모습 그대로 된 사진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태극기를 그리지 않고, 천으로 기워서 만들었습니다.
이 태극기 위에 있는 광화문 사진은 미국사람이 찍어서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 사진의 카피본을 구해서 놓았고,
그 외에 이곳에 있는 모든 사진들과 서적, 자료들도 전부 카피본으로
그 당시에 있었던 위치에 전시해 놓았습니다,
이 방은 손님을 접대하는 식당이었습니다.
지하에 부엌이 있고, 하인들이 요리를 해서 운반했다고 합니다.
병풍으로 꾸민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층의 접견실입니다.
샹들리에는 사진대로 다시 제작했고, 가구들과 양탄자도 재현했으며,
소품들이 모두 19세기에 쓰던 것들을 사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것으로 구할 수 없는 물품들은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이 건물을 사서 보수하는 2여년동안 주문제작했다고 합니다.
2층에 있는 공사의 집무실입니다.
2층에 관련된 사진자료는 남겨진 것이 없지만, 우리가 누굽니까?
그렇습니다. 기록의 민족입니다.
당시에 방안에 있는 가구및 소지품을 비롯한 모든 품목들 하나하나를 다 기록에 남겼다고 합니다.
어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현하기 아주 쉬웠습니다.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모여서, 고종과 고종이 머문 궐을 향해서 의례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곳 2층에는 도서관도 있었고, 책이 총 600권 있었는데 그 숫자까지 기록이 되었답니다.
저 캐비넷위에 갓은 이곳에 부임했던 이범진공사가 취미로 수집하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넷플릭스의 킹덤을 보고, 갓에 반한 외국인들 많다는데...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 패션이라고 뒤쳐지랴 싶습니다.
1층은 내방객을 맞이하고 접대하기 위한 공간이라면,
2층은 공사의 업무실과 침실, 공사직원 사무실과 도서관으로 본질적인 업무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공사의 침실입니다.
기록에 남겼답니다. 공사는 퀸사이즈침대를 썼다고 말입니다.
여기는 2층에 있는 직원들의 근무하던 장소 있니다.
앞에 보이는 것이 편지를 쓰고난 후 밀봉하는기계이고, 저쪽은 저울입니다.
그 당시에 화폐를 어쩌지 못하니, 결제를 금이나 은으로 했는데, 그런 걸 재던 용도였다 합니다.
이 직원들이 쓰던 방안에는 그 당시에 사용했던 타자기부터 선풍기까지 물품들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위 사진의 책상이 있는 벽에 붙어 있던 그 당시의 지도입니다.
지금은 미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것은 카피본인데요.
붉은 펜으로 그려진 곳이 대한제국 공사관의 위치입니다.
근방에 청나라 공사관등을 비롯하여, 스페인공사관등 다양하게 있었는데,
대한제국 공사관을 저리 찝어 표시한 것을 보면 당시에 활약이 상당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층에 있는 욕실의 모습입니다.
19세기의 미국에서도 앞서가던 시설입니다.
수도도 집안에 설치되어 있었고, 최신식 세면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던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갓 수집이 취미셨던 이범진공사의 가족입니다.
이곳에 부임한 후에 프랑스에 공사로 가셨답니다.
가운데 있는 아이가 이위종이라고, 이곳에서 4년살고, 프랑스로 가서 또 살고, 거기서 육사를 나오고..
그리하여 7개국어에 능통하여,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입니다.
뜻을 못 이루고, 러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적 인물을 만납니다.
이완용이 이곳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공사아니고, 직원으로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부임한 이완용의 처가 왼쪽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렀습니다. 이완용부인의 얼굴입니다. 왼쪽이...
오른쪽 여인은 이채연공사의 부인 배씨부인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신여성이었고,
열심히 조선을 위해 힘을 쓰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헷갈리면 큰 일 납니다.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완용부인으로 오해받으면 배씨부인께서 얼마나 억울할까요?
당시에 이완용은 친미파였고, 그 다음에는 친러파, 그리고 친일파 테크를 탔다고 합니다.
참으로 일관된 삶이었지요.
죽을 즈음, 아들에게 다음엔 미국이 쎈듯..했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렴 믿어집니다..
직원들의 숙소였던 3층은 각종 자료가 있는데,
열려진 창밖으로 경치가 너무 좋습니다.
밖에는 고층제한으로 하늘이 넓고, 나무는 우거지고, 한가롭고, 아름다운 디씨의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그리고 여름 겨울에는 어디서나 공짜인 박물관이 수북한 곳입니다.
오시면, 쉬어 가듯, 숨어 있는 오래된 이곳을 방문하시길.
주소입니다.
1500 13th st.NW
Washington D.C. 20005
링크는
이젠 이곳은 박물관입니다.
여권갱신한다고 오지 말랍니다. 제발~
여권갱신은 듀퐁써클로 가면, 한국영사관 있어요.
문화재청이 큰 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