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거, 결국 습관

(소설 11화) 니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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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이른 퇴근이다.

집에 도착해 보니, 집 앞에는 아빠의 트럭 대신 오래된 시빅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서 권사님이다.

내가 사는 쪽의 현관문을 들어가려면, 집을 한 바퀴 둘러서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뒷마당 한편에서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다가 배추를 쌓아놓고 절이고 있는 서 권사님의 모습이 보였다.


이민을 오고 7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뉴욕으로 진학을 했고 동생은 한국으로 결혼을 해서 나가게 되었다.

엄마는 자신이 강하게 원해서 이민을 왔는데도, 답답한 미국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이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자, 동생의 육아를 돕는다며 한국으로 나가 버렸다.

아빠는 홀로 이 집에 남아, 핸디맨 일을 하여 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 학비에도 보태고, 엄마의 생활비로도 송금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자신처럼 순하고 우유부단하여 이리저리 치이는 서 권사를 만났다.


“쎄라, 오늘은 일찍 오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였다.

“아빠는 소금 사러 마트에 갔어요. 배추를 잘라 놓고 보니,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좁아서, 이렇게 마당에서 하면 좋잖아. 널찍하니..”

서 권사님은 내게 말을 놓지도 올리지도 못해서 교묘하게 섞어 쓰신다.

묻지도 않아도, 자신이 이 곳에 있는 이유를 열심히 변명을 하신다.

나와 아빠와 자신이 먹을 김치를 담그면서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비 옷처럼 생각한다.

비가 올 때만 절실하고 요긴하게 사용하다가, 날씨가 다시 반짝일 때면 옷장 한 구석에 처 박아 버리는 비 옷 말이다.

그들에게 가족 구성원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세상에 자신이 결격사유가 없음을 증명하는 요긴한 용도이다.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구색을 갖추지 않으면, 왜 가족을 이루지 않았느냐고 묻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색을 갖춘 이들에게 당신은 그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사느냐고는 따로 묻지 않는다.

나와 아빠는 엄마와 동생에게 그런 존재이다.

실상이야 어떻든, 듣기에 그럴듯한 변호사 딸과 사업하는 남편으로 필요할 때마다 걸치고 나가기에 더할 나위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걸로 그 효용가치를 다 한다.

물론, 노년에 이르러서 아프고 거동마저 힘들어질 때의 보험으로도 착실하게 계획을 깔아 놓았다.


이혼 후에 나는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이 곳을 떠나고 싶었고, 더 정확히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한국으로 나가 몇 년이라도 살아 볼 생각을 했을 때, 엄마와 동생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현실 회피하지 말고 여기서 승부를 보라며, 번갈아 전화를 부지런히 해대며 나를 말렸다.

그 당시에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 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이켜 보니, 그들이 한국에서 다른 친척들과 사람들에게 포장했던 이미지를 내가 깰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빠와 서 권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난번 엄마가 한국에서 방문하러 이곳에 왔을 때 운을 떼기도 했었다.

엄마에게도 눈치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

돌아와서 아빠와 같이 지내든지, 정리를 하든지 하라는 내 뉘앙스에 엄마는 정색을 하고 화를 내었다.

어떻게 피를 나눈 가족인 내가 엄마 편을 들지 않느냐고 엄청 섭섭해했다.

딸이 되어서 편을 들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그런 정리라는 말을 입에 담느냐며 길길이 뛰었다.

엄마는 진심으로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아주 길고 반복적으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엄마가 길게 말했지만, 핵심은 그냥 이 상태로 지내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이었다.


가족 간의 관계는 특히, 부부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가해자만 되거나 일방적인 피해자만 되거나 하지 않는다.

둘은 보통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번갈아 한다.

물론, 먼저 잘못한 사람이 있고, 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있고, 주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있다.

관계란 주고받는 것이 거의 다인 게임이니까.


이상한 것은 그 게임의 룰을 대부분 잘못한 사람이 주도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략과 전술에 능하며, 온갖 좋은 대의명분을 선점하는 데에 발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이 상처 입힌 상대가 몸부림으로 자신에게 되받아칠 때, 그것에 대한 반동을 이용하는 것에 강하다.

마치 처음에 잘못을 저지를 때, 상대의 몸부림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짜는 거처럼.

확연히 다른 무게의 상처를 비슷한 것으로 만들거나, 자신이 받은 것을 더 크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엄마의 어떻게 우리 가정이 깨질 수 있냐는 눈물까지 보이며 내게 절절히 호소했다.

그 대의명분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늘 엄마의 명분으로 가득 찬 호소 앞에 무기력했다.

무기력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기력한데,

그중에 자신의 무력함을 끊임없이 되뇌게 하는 것이 가장 무기력하다.

내 입을 닥치게 함으로 엄마는 이런 관계에서 나를 방관적 동조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엄마는 이제까지 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 것이다.

엄마는 달인이다.

대의도 명분도 시스템도 그리고, 가족도 모두 엄마의 편으로 만드는 능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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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 입고 나니, 서 권사께서 쟁반을 들고 오셨다.

호박죽을 끓였다며 내게 건넸다.


“들어요. 먹을만할 거예요.”

“ 아. 감사합니다”

“아빠가 저번 주말에는 우리 쎄라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갔다고 자랑했어.”

“일 때문에 누굴 만난 거예요.”

“그래도.. 쎄라가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고 있다고 걱정했거든.”

몰랐다.

내 티브이 시청이 이리 사회적 지탄을 받을 일인 줄.


서 권사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국가에서 제공한 노인 아파트에서 이혼한 아들과 사춘기 손녀랑 함께 산다.

노인 아파트를 제공받은 것도, 900불씩 나오는 저소득층 연금을 받는 것도 서 권사 덕택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아파트의 거실에서 생활한다.

서 권사의 아들과 손녀가 방을 각각 하나씩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연금으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가 요리하는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하루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않는다고 한다.

서 권사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이유다.

자기만의 방은 인류의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남녀노소 없이,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방이 절실하다.

그 자기만의 방이 노년의 서 권사처럼 진짜로 맘 편히 몸을 누일 방 한 칸이 될 때 가슴은 서늘해진다.


내일 사무실을 나가지 않으려던 계획을 바꿨다.

서 권사와 아빠가 마음 편하게 절인 김치를 씻고 양념을 바르게, 자리를 피해 줘야겠다.

한 두어 달 내가 이 집을 비우면, 서 권사와 아빠가 긴 겨울 동안 좀 더 마음 편하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자유롭게 오가며, 그들이 좀 더 예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아니다.. 하며 고개가 저어 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대만 잘 고르면 저렇게 한 없이 나약하고 늘 미안스러워하는 몸짓은 어쩌면 고단수의 처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청춘에는 청춘이라 이루지 못하고, 중년에는 중년이라 이루지 못하며, 노년에는 노년이라 이루지 못한다.

미숙함과 책임감, 그리고 딸린 식구들의 눈총이 단계별로 장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마저 습관이다.

그게 뭐든 돌파하고 이루어 본 사람만이 돌파하고 이룰 줄 아는 기술이다.

물론, 기술자이든 아니든 결론의 모습은 비슷하다는 인류 역사의 기승전 슬픈 사연이 결국 기다리고 있지만.






#사는 거이_결국 습관

#바꾸기 어려움 주의


#사진과 글은 스스로 찍고, 썼으며,

#그림은 앙리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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