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인 나무

(소설 12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사무실에 도착했다.

정변이 소파에서 그 커다란 네모란 몸을 있는 대로 구겨 넣고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 이후로 정변과 얼굴을 맞대기가 불편해졌다.

그가 내가 온 모습을 보기 전에, 다시 사무실을 나가버릴까도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잠들어 있는 정변 뒤로 그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놓인 프린트물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법원에 보낼 소장을 서둘러 끝내려고 여기서 밤을 새운 모양이다.

정변의 사무실은 책상만 빼고 온통 어지럽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표시가 된 프린트물은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휴지통은 차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휴지통 안엔 물병과 소다 캔, 바나나 껍질, 초콜릿 껍질로 가득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안쪽의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는 김경주 씨가 두고 간 USB를 넣었다.


USB에는 진수덕 화백에 관한 모든 자료들이 카테고리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림들과 작품에 대한 설명, 각종 인터뷰 기사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 그리고, 진수덕화백의 가족사진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클릭할 때마다 떠 올랐다.

진수덕 화백의 삶은 단순히 성공한 여성화가로만 정의하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림에서도, 글에서도, 인터뷰에서도, 일관되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세계와 삶이 보였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인데, 봉건의 시대 한 중앙을 심란하게 지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을까.

무엇이 그런 그녀의 삶에 중심에 흐르고 있었을까.

한 여인의 생애가 연대별로 변화해 간 그녀의 그림과 함께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의 나무를 보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벽에는 내가 늘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가 기대어 자라고 있다.

그 나무는 지난 이 년 동안 나에겐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었다.

뉴욕만 아니라면, 가서 진수덕 화백이 도대체 어찌 지내시나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뉴욕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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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라.”

정변이 문 앞에서 나를 불렀다.

부스스한 얼굴에 하룻밤 새 자란 수염으로 그 사이 산적이 되셨다.

“오늘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정변이 하품으로 문장을 완성하며 말을 했다.

정변이 나의 행동을 예측을 하는 거에 기분이 나빠졌다.


“정변, 내가 이 세상의 온갖 벽들을 다 쳐다봤는데 말이야."

나는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나무에게로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책상에서 보는 저 벽만큼 볼 만한 게 없어서 말이야. 저 벽 봐주러 나왔지.”

정변이 피식하며, 내 말을 받았다.

“나도 여기 카우치만큼 편한 데가 없어서..”

그런 정변을 다시 정면으로 쳐다보다가,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저 벽 말고, 리버사이드에 있는 벽도 봐줄 때가 되긴 된 거 같아”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사실, 의미 있는 선택이랄 것은 살아가면서 몇 번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뭐에 발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몇 번 없는 선택을 한 것 같다.


정변이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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