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3) 나라는 습관
호기롭게 뉴욕으로 가겠다고 단언했지만, 이내 곧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은 아닌 거 같았고, 잘 다독여 눌러 놓았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상처가 대용량으로 저장된 시간들은 총 천연색으로 각인되는 영구보존용 필름 같았다.
한 번씩 상용 버튼이 우연히라도 눌러질 때면, 중단되는 법 없이 끈질기게 재생되었다.
벌써 며칠 밤을 뒤척였다.
정변이 뭐라 한 마디 언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무슨 핑계라고 엮어서 발을 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변은 내가 뉴욕에 가는 일에 관해서는 가차 없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줄곧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나는 어디든 내가 이동하는 곳이면 늘 함께 한 캐리어 가방을 옷장에서 꺼내서 짐을 쌌다.
아침 일찍 나와서, 페어팩스 비엔나 전철역에서 출발하는 뉴욕행 버스를 탔다.
“아.. 오..”
뉴욕으로 가는 네 시간여의 시간 내내, 나는 속으로, 그리고, 겉으로 신음했다.
내가 왜 간다고 했을까를 후회하며, 나를 탓하고, 김경주를 원망하고, 정변을 아메리칸 서타일이라고 욕했다.
버스가 필라델피아를 지날 때부터는 머리가 아파왔다.
다시 창 밖을 보았다.
내가 잘못한 결혼생활도 아니고,
뉴욕이라는 도시를 바람나서 도망간 전남편에게 위자료로 쥐어 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평생 뉴욕을 피하고 싶고 뉴욕이라는 말만 들어도 멀미가 난다.
무엇보다 이렇게 나 혼자 아직도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스로가 싫어서 미칠 것 같다.
관계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늘 주는 편에 서야 한다.
받는 편이 되면, 피해야 할 것도, 도망가야 할 것도, 맞서서 해결해야 할 것도 많다.
이리 나가떨어지기도, 저리 맞붙어 싸우기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상처 받은 역은 할 일만 많은 후진 역이다.
버스가 뉴저지를 지나갈 무렵에는 식은땀이 났다.
호흡도 잘 안 되는 것 같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서서히 내쉬었다.
별 짓을 다한다 싶었다.
이러다 애라도 하나 버스에서 낳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버스 운전자 옆에 전광판에는 이제 뉴욕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고 표시를 떴다.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가 온 걸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랭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Welcome to NYC, Sarah..” 로 시작되는 문자는 랭에게서 온 것이다.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이 놀랍고 환영할 일이니,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내용이었다.
정변이 연락했을 것이다.
랭은 정변과 내가 Pro Bono(변호사들이 의무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법률봉사)를 했던 시민단체에서 일했던 소셜워커이다.
작년부터는 시민단체를 그만두고 컬럼비아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랭과 정변은 내가 그들을 알기 전부터 이런저런 일을 같이 하면서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그 두터운 친분의 비밀이 정변을 향한 랭의 호감이라는 사실을, 나뿐 아니라 그 단체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오직, 정변만 모를 뿐이다.
허겁지겁 랭과의 약속을 잡는 문자를 몇 개 보내고 나니, 버스가 펜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지하철로 향했다.
뉴욕은 여전했다.
뉴욕은 늘 도시 전체가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서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도시였다.
땅 표면을 기준으로, 화려하고 번듯한 지상세계와 쥐가 출몰하는 지하세계로 나누고,
각각의 세계를 대표하는 두 얼굴을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다.
아침이라는 조명으로 무대 막이 오르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높은 빌딩 안에서 일을 하는 연기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지하로 내려와서 구걸하는 걸인을 지나서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낡은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연기로 하루를 마감한다.
나는 그들 속에 묻혀서 행선지를 찾아가는 역할로 스며들었다.
전철이 창 밖으로 어둠과 오래된 타일을 번갈아 내 보이다가, 컬럼비아 대학이 있는 116 스트리트에 멈추었다.
그나마 여기서 내린 것이 다행이다.
전남편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지나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낯익은 상가와 오래된 건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고, 그 풍경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였다.
나는 입을 꽈악 다물었다.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집에 데려오자, 전남편의 부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환영했었다.
한국말을 하는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했다던 그들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달라졌다.
한국말을 할 줄 알고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며느리는
그들을 가부장 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트리거 같은 존재였다.
하나씩 나에 대해, 정확히는 내 배경에 대해 스무고개식의 호구조사를 하여 데이터를 구축하였고,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그들은 굳이 내게 실망하는 빛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컬럼비아가 아니라 뉴욕시립대 로스쿨을 다니는 것도, 거기다 학부를 커뮤니티 칼리지를 나온 것도, 부모님이 별 볼일 없는 직업인데, 그렇다고 이민전에 한국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아닌 것도,
내 모든 것은 전남편의 부모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들이 미국으로 유학 올 70년대의 한국을 추억할 때였다.
국가에서 유학을 희망자들을 모아 놓고 국사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심결에 왜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 역사를 제대로 모르면 외국에서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었다고 한다.
상대 국가에서 장학금을 보장받은 유학생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들이 요즘 유학생들의 수준을 흉볼 때면, 그 험담하는 대상이 나인 거 같은 느낌이었다.
뼈에 아주 깊숙이 박힌 엘리트 의식이 끊임없이 나를 향해 혀를 차는 것처럼 들렸다
이민 온 사람들은 자신이 떠날 때의 시곗바늘로 고국의 가치관을 고정시킨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70년대 말이었다.
서구화된 매너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곳곳에서 봉건적인 계급의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내가 그들의 말과 문화를 다 알아들으니, 날이 갈수록 짙어지기만 했다.
당대의 최고 수재로 태평양을 건너온 한국 출신 유학생으로,
오로지 본인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수평적 사회인 미국 땅에서 일군 그들의 성취가
오히려 뿌리 박힌 수직적 계급의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 듯했다.
겉으로는 세련되게 나를 대하고 나와 아들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를 향한 그들의 시선이 어떠했던가는 전남편이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와 바람이 났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강가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대어서 코 끝이 찡해 왔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도 습해서 물기를 고이게 한다.
나는 계속 코를 훌쩍 대었다.
그것들을 흘러내리지 않게,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그리 걷다 보니, 리버사이드 360 번지 앞이었다.
#이랬던 뉴욕이었는데 ㅠㅠ
#첫번째와 두번째 작품은 Hirshhorn 뮤지엄에 올 겨울에 설치된 Pat Steir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