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4화) 나라는 습관
나는 잠시 아파트 앞에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으로 외관이 꾸며진 아파트는 맨해튼에 있는 그 다른 아파트들과 별 다를 것 없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지난 세월을 감출 수 없는 아파트의 입구에는 24시간 상주하는 안전요원이 있었다.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들어갔다.
아파트 일층 중앙에 높이 달린 샹들리에 아래로는 소파가 놓인 로비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서 안 쪽으로 들어가니 사무실이 나왔다.
사무실은 운동기구가 놓인 짐과 부엌이 딸린 파티룸 옆에 있었다.
여기저기 구식인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잘 관리되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앞으로 이곳에 거주할 사람으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공용 출입문과 우편함의 열쇠를 챙겨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6층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들로 산만했던 정신이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니 한 곳으로 모아졌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켰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섰다.
나는 서둘러 내려서, 얼른 눈으로 아파트들의 호수를 훑었다.
진수덕화백과 이정선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603호였다.
코너에 있었고, 내가 머물 아파트에서 한집 건너에 있었다.
이 아파트는 건물의 한 면만 허드슨강을 볼 수 있는 구조이다.
그래서, 그 뷰를 각 아파트에 최대한 골고루 배분하려고 설계를 한 것 같다.
아파트가 생활 동선의 편리보다 강을 볼 수 있는 것에 중점이 되어서 복도를 한쪽으로 몰고 긴 구조로 되어 있었다.
천천히 복도를 지나서 내가 머물 아파트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누군가가 지금도 살고 있는 듯한 아파트의 공간이 내 방문에 놀라듯 화들짝 했다.
이전 주인은 오십 대 독신여성으로 혼자 살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제대로 상속을 받을 가족이 없어서, 애리조나에 사는 그녀의 먼 친척 두 명에게 모든 유산이 돌아갔다.
그녀 생전에는 서로 아무런 친분이 없었던 유산 상속자들은 Estate전문업체에 위임해서 재산을 처분함으로 뉴욕까지 오는 수고를 덜었다.
Estate업체 직원들이 집안의 물건 리스트를 작성하느라 집을 헤집고 돌아다녔나 보다.
온 집안 여기저기 생활용품들이 소란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손길이 머물렀던 아파트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펫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나를 보고 반가운 듯했다.
현관에 서서 멍하니 햇살이 가득한 어지러운 살림살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웰컴 투 뉴욕시티.. 쎄라”
아파트에서 게스트룸으로 보이는 작은 방을 찾았다.
그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랭을 만나러 나갔다.
나가는 길에 진수덕화백이 사는 아파트를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가서부터는 뜀박질하듯이 빠른 속도로 걸었다.
랭과의 약속 장소는 컬럼비아대학 정문의 건너편에 있었다.
랭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다고 팔짝팔짝 뛰었다.
오지랖 넓고 에너지가 충만한 랭은 정변의 말 많은 여자버전 같았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아침에 마신 라테 한잔이 전부라서 속이 쓰려 왔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에 랭이 디씨에 사는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배도 고프고,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며 안부를 나누는 촘촘한 대화가 피곤하기만 했다.
먼저 나온 커피에 크림을 잔뜩 부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랭이 궁극적으로 궁금해하는 정변의 안부로 직진했다.
“다들 잘 지내. 정변도 여전하고. 여전히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서 채이고 다니느라 좀 바쁘긴 해도..”
랭의 얼굴이 내 말에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왜 그렇게 차일까?”
기쁨이 반, 안도가 반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랭이 물었다.
“눈치가 더럽게 없으니까!”
우리는 둘 다 웃었다.
랭이 나를 쳐다보다 말했다.
“마크(정변의 영어 이름)가 어제 전화를 걸어, 쎄라를 부탁했어. 하루에 한 끼를 꼭 쎄라랑 먹으라고.”
나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내 기색을 살피던 랭이 말을 이어갔다.
“나도 웬 오버인가 했는데, 아까 쎄라를 보는 순간, 마크가 걱정할 만하구나 했어.”
“내가 어땠는데?”
“ 쎄라가 우리 단체로 법률봉사 처음 온 날도 그런 표정이었어. 법률 조언을 하러 온 사람인지, 법률 조언을 받으러 온 사람인지 헷갈리는 얼굴 말이야.”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음식을 보니, 밀어 두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탄수화물이 몸에 들어가고, 카페인이 혈관에 흐르니까 살 것 같았다.
배도 불러오고, 아까 들은 랭의 말이 찔려서 내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물론, 랭이 듣고 싶어 하는 정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나야말로 그의 사리사욕 없는 일 욕심에 죽어 나는 사람이니, 정변을 그 누구보다도 씹을 권리가 있다며, 한참을 그를 뒷담화했다.
랭은 깔깔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쎄라, 그런데, 죽은 사람의 물건이 가득한 아파트에서 머무는 것 괜찮겠어? 무섭지 않을까?”
랭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물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좁긴 해도 자신의 방에서 재워주겠다고 한다.
랭이 머무는 컬럼비아대학의 숙소도 근처에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심란하긴 하지만, 괜찮아. 죽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어. 죽은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럼, 쎄라는 뭐가 무서운데?”
“ 글쎄.."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솔직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전남편을 마주칠까 봐 무섭지..”
랭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쎄라, 니 Ex도 죽은 사람이야. 남편으로는 말이야.”
랭의 말이 맞다.
나도 안다.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랑 함께 산 일 년이라는 시간보다 몇 배의 시간이 흘렀다.
이젠 그도, 나도, 서로를 추억할 만한 그 어떤 연결고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은 쉬이 죽어도 상처는 오래 살아남더라.
때를 기다리는 그림자처럼 사람에게 달라붙어 숨을 죽인다.
평상시 바쁜 일상은 깜깜한 밤과 같다.
그럴 때 그림자는 어둠과 구별되지 않게 섞여 있다.
그림자는 기다린다.
면역력이 가장 약해질 때를.
해와의 거리가 최대치로 멀어지는 해 뜰 녘 새벽과
해 질 녘 황혼에 가장 길고 짙은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그래서, 힘들 때에 가장 힘들게, 아플 때에 가장 아프게, 서러울 때에 가장 서럽게 한다.
누군들 이미 끝나버린 관계를 붙잡고, 계속 통곡하고 싶을까.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랭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고 있는 말이라도, 가장 상투적인 말이라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걸,
귀로 듣는다는 건,
혈관으로 따뜻한 피를 수혈받는 것 같다.
랭은 정말로 나와 하루 한 끼를 날마다 같이 할 작정인 듯했다.
추수감사절도 같이 지내고,
컬럼비아 대학의 도서관도 같이 이용하고,
생기 넘치는 랭이 줄줄이 읊어대는 계획을 들으며,
나는 정변이 말수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랭이 그동안 뜸하게 먹었던 한국음식을 먹자고 했다.
32번가에 있는 한인타운에서 내일 만나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에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랭이 나를 핑계로 정변에게 계속 연락을 할 것을 알기에 그러기로 했다.
배가 부르고 친구가 옆에 서서 같이 걸으니,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아까처럼 사납게 느껴지지 않았다.
리버사이드 아파트에서 한 블록 아래에 랭의 기숙사인 Carlton Arms에 먼저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리버사이드 아파트의 앞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아래로부터 6층을 세어서 603호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두운 긴 공간이 코너에 있었다.
#뒷 끝이 길수록, 힘이 세다
#첫번째 그림은 Yves Tanguy, 두번째는 앙리룻소, 세번째는 에디호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