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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과마눌 Jan 25. 2021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시 리뷰) 최정례 시인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최정례

여자는 빨래를 넌다
삶아 빨았지만 그다지 하얗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햇빛이 동쪽 창에서 서쪽 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자는 서쪽으로 옮겨 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
서쪽 창의 햇빛도 곧 빠져나갈 것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봄이 있었다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어쨌든 네가 입게 된 옷이야
벗어버릴 수는 없잖아 예의를 지켜
얼어붙었던 것들은 녹으면서
엉겨 매달렸던 것들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형이 다니는 피아노교습학원 차를
타고 싶어서 쫓아갔다가 동생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얘기
그가 라디오에 나와 연주하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멀리 산이 보였었는데
이 집은 창에 가득 잿빛 아파트뿐이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것
우연은 간곡한 필연인가
우연이 길을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 했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르렀겠지
잃어버린 봄, 최초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때인 것 같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오른다
우연과 필연이 서로 꼬리를 치며 꼬드기고 있다
문득 서쪽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건 다 니 탓이라고

이런 식으로 말하기를 즐겨한 사람은 난데

이런 식으로 말하다가는 거기까지 일 것 같아서

사람을 가리고

타이밍을 가리다

입 안에만 머물고

마음으로 삼키고 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며

누구나 실은 알고 있는 

복선과 의뭉이 샅바 싸움을 하고

우연과 필연이 서로를 역겨워 하는 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했으나

이딴 이런 식으로 살 줄 몰랐고,

거기가 거기인데

그딴 거기일 줄 몰랐던, 

맹렬하게도 삶을 삶고

퇴근하는 지친 몸통들 위로

지는 해를 바치고 싶다.


지는 해는 말이 없더라고


#사진위는 시인의 시

#사진 아래는 쑥언니 사설

#며칠 전 떠난 최정례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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