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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과마눌 May 14. 2017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인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전문



노안이 온 나는

소설은 제끼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단지 글자 수뿐만 아니라,

소설의 문장과 문장사이에 켜켜이 들어 있는

숱한 사연들일랑

내가 이미 실시간 쩔어 있기 때문이다.


박준 시인의 책이 나온

문학동네 시인선은

문학과 지성사보다 2000원이 싸서 

읽는 아줌마는 흐뭇했더니만.


2000원만큼 

흐릿한 글자 때문에 

듬성한 시인의 말이 흐릿해져서

책을 든 팔을 멀리 뻗었다가,

다시 가까이 오무렸다가 

그러면서 읽는 시집의 구조가 되었다.

 

박준의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고, 재미있다.

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의 시에는 

살아서 이미 유서를 쓰고,

살아서 스스로 장례를 치른 사람의 마음이

면면히 흐르는 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다가도,

그런 마음이 들더라.


살아서 열두 번의 유서를 쓰고,

살아서 열두 번의 장례를 치러도,

그 거이 무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산다는 건

만나서 드러웠고

다시는 같이 하지 말자며

서로를 골로 보내는 장례가

지뢰밭 한가운데 흩어진 똥처럼 허다한 판인지라


그리하여, 

어느 장례 하나도 시원찮다는 것을..

어느 불면의 밤 한조각도

still hungry 한 잡것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을 ..

더 이상 힘들지 않으리라는 맹세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도 피할 수도

모르고도 지나갈 수도 없다는 걸

영민한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의 시에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홰치듯 달리는 반짝이는 물고기들 

가야 할 머나먼 바닷길을 앞두고도,

숱하게 쌓일 상처들을 앞두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는 그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노안 오면

그때 그는 어떤 표정으로 시를 쓸까

[출처]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작성자 쑥과 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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