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몰랐던 병아리
초등학교 때 교문을 나서면 누런 박스에 노란 병아리들을 파는 분들이 육교를 따라 가지런히 앉아 있었어요. 한 마리 오백 원. 엄마는 절대 사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초등학생이 거절하기엔 너무 큰 유혹이었어요. 어느 날 유독 예쁘고 씩씩해 보이는 녀석을 집에 데려가고 말았어요. 엄마는 올 게 왔구나, 하는 철렁한 얼굴을 하고 그냥 웃어줬어요. 아이가 상처받을 줄 알면서, 뻔한 미래를 알고도 스포일러를 날리지 않고 마른침을 삼키는 어른의 입장이란 건 그 나름대로 또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보기만 해도 너무 좋아서 자꾸만 쓰다듬었는데. 그 녀석은 그날 저녁부터 갑자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더니 병아리별로 가버렸죠. 움직이지 않는 병아리가 자는 줄 알고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짚어본 손끝에 와닿던 굳은 새의 느낌. 아직도 스산해요. 오래도록 생각했어요. 그 병아리는 왜 그렇게 빨리 가버렸을까. 조금 더 삐약삐약 울고 쌀알을 받아먹고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나랑 지내줘도 좋았을 텐데. 동트는 새벽 고요한 집을 시끄러운 진동으로 깨워보아도 됐을 텐데.
생각해 보면 나는 그걸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몰랐어요. 섣불리 들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논어>인가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신기한 새를 주워서 신난 사람들이 진수성찬을 차려줬지만 그 새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가끔씩, 내가 모두에게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선택해 집으로 들여온 것. 그것과 겪어내야 하는 첫 이별. 쉽지 않았어요. 너무 마음이 어려워서, 아빠가 땅에 묻어줄 때 그 병아리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그 뒤로 저는 병아리 파는 상인들이 보이면 눈길도 주지 않고 후다닥 뛰어서 지나갔어요. 눈에 보이면 아프니까. 고작 서너 시간을 함께 했지만 나는 내 병아리를 사랑했으니까. 사랑은 시간에 관계없이 오래도록 흔적을 남기니까.
모른 척 입에 넣는 닭칼국수
눈에 보이면 아프기 때문에 외면하는 습관은 여전해요. 달걀을,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축산업계가 동물의 고통을 아랑곳 않는 지금의 시스템을, 저는 언제까지 외면하려는 걸까요? 언제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모른 체하면서 달걀과 닭가슴살과 치킨 따위를 속 편하게 입에 욱여넣을까요?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라는 책을 읽으려고 한 적이 있어요. 눈물을 흘리고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힘겹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결국 반도 읽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책을 덮으면서 스스로의 비겁함과 무력함을 얕은 땅에 묻는 기분이 들었어요.
축산가공 현장에서 효율성을 핑계로, 또 인간의 스트레스를 핑계로, 가공 과정과 무관하게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돼지의 코를 베고 상처에 소금을 뿌려버리는 이야기. 빨리 컨베이어벨트로 걸어가지 않는 오리와 닭의 다리를 꺾는 이야기. 수면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털을 뽑아내고 살을 베어내는 이야기. 끓는 물에 갑각류를 산채로 던져 넣는 이야기. 우리는 모른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정말 모를까요?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걸까요. 매일 이 집도 저 집도 요 집도 모두 먹을 만큼의 고기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보면 다소 이상한 일일 텐데요. 일이천 원 웃돈을 주고 동물복지계란을 사는 것으로 면죄부를 산 것처럼 으스대는 저는, 다른 종이 인류를 가축처럼 대하는 때가 오면 변명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살처분의 형에 처해지겠죠. 그래도 저에게 수면마취제는 좀 써주면 좋겠군요.
무거운 이야기는 이만 할게요. 저는 닭을 유독 좋아해요. 물에 빠뜨린 고기, 그러니까 수육이나 족발은 싫어하지만 닭은 물에 빠뜨려 먹어도 맛있어요. 닭칼국수, 삼계탕은 없어서 못 먹죠. 닭가슴살은 좀 별로긴 하지만 다이어트하고 운동할 땐 그만한 게 없죠. 대학 시절에 너무 좋아해서 거의 매일 먹던 닭칼국숫집이 있어요. 기분이 좋아도 먹고 그냥 그래도 먹고 조금 아픈 것 같아도 먹고… 아마 제가 그 집 인테리어에 타일 몇 장 정도는 기여했을 것 같아요. 그 집은, 기숙사가 모여있는 구불구불한 언덕 사이를 이십 여분 넘게 오르고 내려서 가야 했어요. 함께 갔던 교수님이 식사를 마치고 “가는 길에 소화 다 되겠다” 하셔서 무안하게 쿡쿡 웃은 기억이 나네요.
졸업하고 그 집을 다시 가진 않지만 힘들 때면 근처 닭칼국숫집을 검색해요. 닭 육수가 뭉근히 풀려나 조그맣고 동그란 기름이 국물에 둥둥 떠있는 국수를 헤집으면서 땀을 흘리고 가게를 나서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들거든요. 보통 닭칼국숫집은 김치도 맛있고요. 대학생 때 종강을 축하하면서 와글와글 둘러앉아 닭칼국수랑 옛날 치킨을 뜯던 기억도 기분 좋게 뒷목을 간질이고요. 힐링이 뭐 별 건가요. 그런데, 기분 좋다고 생각할 때를 가장 조심해야 해요. 이 많은 닭들이 어디서 오는 거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니까요.
아는 게 힘이다 vs 모르는 게 약이다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은 늘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아는 게 힘이라고 말하면서, 학교에 준비물을 깜박 잊고 간 날이면 ‘전쟁터에 총알도 들고 오지 않은 놈’이라며 공부를 전쟁과 나란히 비교하고, 포로를 응징하듯 머리를 쥐어박거나 교실 밖으로 쫓아냈죠. 요즘 교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첨예하게 영역 다툼을 하는 요즘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뭐라고 말할까요? 그래도 아는 게 힘이라고 말하는 건 바뀌지 않았으려나요. 여하튼 저는 아는 게 힘이라고, 배운 대로 곧이곧대로 믿고 자랐어요. 열심히 교과서를 외우고 객관식 문제를 풀고 틀리고 풀고 틀리면서. 깊이는 없지만 넓은 영역에 걸쳐 가닥가닥 지식을 빨아들여서.
대체로 어른들의 말은 맞았어요. 아는 게 손해가 되는 적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알면 알수록 깜깜한 것들이 많아요. 동물의 권리. 전세사기. 국민연금. 지구 환경. 출산율과 이 나라의 미래. 저는 알고 있는 이 문제들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 나 하나가 당장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 분명하죠.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아주 커다래보이는 그 벽에 기꺼이 부딪치는 달걀이 되는 방법은 뭘까요? 똑똑히 행동하면서 절망하지 않는 달걀이 되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낙관적인 멍청이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이런 단순한 캐치프레이즈를 염불 외듯 하면서 당면한 미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거요.
때로 알게 된 것을 후회해요. 그냥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고 축산가공의 현실은 나와 멀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다면. 세상의 어둔 구석을 모르고 내 옆에 사랑스러운 것만 보고 살았다면. 제 마음은 좀 더 편했을 텐데. 자연재해처럼 몰려드는 무력감과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터인데요. 그러나 그게 진정으로 좋은 삶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건, 알량한 저의 자존심과 강퍅함인가 봅니다. 인간이 아닌 종의 쾌고 감수 능력을 고려하는 것, 그것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사회 시스템을 정립해 나가는 시작점이 어디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앞으로도 동물복지달걀을 살 겁니다.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알을 낳게 하는 현실을 알면서 몇 천 원 아끼자고 제일 싼 달걀을 사버리는 짓은 안 할 겁니다. 그게 지금 제가 가진 유일한 힘이니까요. 각자가 가진 유일한 힘을 발휘하면서 사는 수십만이 모이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간단하게 믿어버리는 낙관적인 멍청이가 되기로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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