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아폴로
어릴 때 살았던 동네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서로 멀지 않게 있었다. 학교가 많은 만큼 아파트 단지가 많았다(아파트 단지가 많아서 학교들이 있었던 걸까?). 학생들을 겨냥한 군것질거리를 파는 곳이 많았다. 문구점에서 팔던 쫀듸기, 밭두렁, 테이프 젤리, 입술 모양 초콜렛… 그중 제일 좋아했던 건 아폴로였다. 조그만 튜브에 들어있던 달달하고 끈적이는 덩어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필시 설탕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을 그 ‘까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른거렸다.
대학교 동아리 공연을 기획할 때 추억의 과자를 파는 쇼핑몰에서 아폴로와 브이콘 등을 샀었다. 공연에 찾아온 내빈에게 웰컴 푸드처럼 나눠줬다. 공연을 하고 있는 우리도, 찾아온 그들도 비슷비슷한 유년기를 공유했으므로 반응이 좋았다. 하나만 더 줄 수 있냐는 은밀한 제안들을 했다. 친한 사람에게는 남몰래 하나씩 더 쥐어줬다. 공연 후 집에 가는 길에 남은 과자를 까먹었다.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하굣길에 씹던 맛은 나지 않았다. 무궁하고 천진한 호기심을 가진 어린이들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세상이 내게 또박또박 불러준 고난과 자괴감에 입술이 얼얼해져 그런 맛을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자주 다니던 구멍가게에 색색의 아폴로가 들어왔다. 본래는 한 봉지에 흰색이면 흰색, 노란색이면 노란색만 열댓 개가 들어 있었는데, 한 봉지 안에서 다양한 색을 뽐내는 아폴로가 혜성 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때 출시된 건지, 그 가게에 그제야 도달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의 아이들은 열광했다. 무지개색 아폴로를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아줌마도 참, 많이 좀 들여놓지, 매일 같이 투덜댔다. 아무리 일찍 달려가도 나보다 빨리 하교하는 저학년들이 쓸어가 구경조차 못 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희소성을 유지하며 가게 유입을 늘리는 고도의 경제적 전술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신발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면서, 혹은 빙빙 돌리면서, 혹은 신발주머니 손잡이 끈을 이마에 걸고 걷는 기행을 벌이면서 아폴로를 착실히도 빨아먹었다. 튜브의 내용물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빨고 깨물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잘은 몰라도 그 당시에 있었던 나의 고민을(주로 하기 싫은 숙제를) 생각하고 마음을 갈무리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카페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했던 것처럼.
나를 키운 것들
나는 갓 태어나 포대기에 싸여있을 때부터 스물 일고여덟까지 많이 먹은 적이 없다. 식탐을 부린 적도 없고 밥을 잘 먹지도 않았다. 아기 때도 분유를 50ml씩 하루에 두 번 겨우 먹었다니 이야기 끝났지 않나요. 야채도 고기도 생선도 골고루 좋아하지 않았다. 급식을 남김없이 먹어야 집에 보내주던 초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이 고역이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우리 조 아이들의 눈길을 온 얼굴로 받아내며 억지로 식판을 비우고 화장실에 가서 토하곤 했다. 지금도 키와 덩치가 크진 않지만 먹어온 양을 고려하면 상당히 잘 큰 편인데, 나를 키운 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먹었던 군것질거리라고 할 수 있다.
300원이면 종이컵 가득 부어주던 떡볶이, 500원을 내면 튀겨주던 피카츄 돈가스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피아노 학원 앞의 오뎅집에서 팔기 시작한 빨간 양념의 매운 오뎅은 800원으로, 그 당시 간식 중에 상당히 비싼 편에 속했다. 그래도 나는 아빠 구두를 착실히 닦아서(닦는 척을 해서) 받아낸 용돈으로 거의 매일 사 먹었다. 김이 나는 오뎅이나 컵볶이를 사 먹고 뜨거운 입술을 슬러쉬로 식혔다. 친구와 돌아가면서 쌍쌍바를 샀다. 신중하게 침을 발라가며 쪼개 먹었다. 나는 정확히 반절로 갈라내는 데 소질이 없었지만 희한하게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재주를 가진 친구들이 있었다. 크게 쪼개진 쪽을 내가 먹니 네가 먹니 실랑이를 하곤 했지.
우리 집 거실엔 당시 어느 집에나 있던 돼지 모양의 싸구려 플라스틱 저금통이 있었는데 보통 엄마아빠가 남는 동전을 넣었다. 우리 삼남매는 돌아가며 눈치껏 돈을 빼내 군것질을 했다. 엄마아빠도 거기서 돈 빼지 말라고 한 번씩 잔소리했지만 주기적으로 확인을 하거나 우리를 추궁하진 않았다. 그렇게 군것질로 필수 칼로리를 채우면서, 또 정글짐과 뺑뺑이에 매달려 코어 근육을 키우면서 컸다.
꼭 원심분리기 같이 생긴 뺑뺑이는 지나가던 중학생, 고등학생 언니오빠들이 매우 빠르게 돌려주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뺑뺑이를 돌려주는 쪽도, 꺄아 꺄아 소리를 지르며 올라타는 우리 쪽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간혹 너무 세차게 돌려줘서 뺑뺑이의 손잡이를 놓치고 날아가는 애들도 있었지만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교 때 과학 공부를 할 때 뺑뺑이에서 날아간 아이들은 원의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겠구나, 어설프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몇 바퀴를 있는 힘껏 돌려준 뒤엔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돌이켜볼수록 정말 이상하고 재미난 문화였다.
추억의 먹거리 이야기를 하다가 90년대 어린이들의 놀이터 문화까지 왔다. 사람은 먹을 것만으로 자라는 건 아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사회와 문화가 키운다. 놀이터에서 언니오빠들이 뺑뺑이를 돌려주던 것, 우리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면 옆집에서 자연스레 맞아주던 것,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불소 소독을 하고 구충제를 먹던 것, 결핵 환자를 돕는 명목의 크리스마스 씰을 강매당한 것… 사람들끼리 불쾌한 오지랖도 많았지만 고요하게 흔들리는 호의도 많았던 신기한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90년대를 낭만의 시대로 일컫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릴 땐 낭만의 시대를 살았고 자라서는 낙담의 시기를 보냈다. 앞으로는 어떤 살아감을 마주하게 될까. 소탈한 낙관이 중요하다고 점차 생각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본 어떤 할머니가 그랬다. 마지막에 웃는 놈이 이기는 놈인 줄 알았는데, 많이 웃은 놈이 이긴 놈이라고. 이제는 내가 나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분명한 방향성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희망을 놓지 않고 행복회로를 잘 돌리는, 농담을 멈추지 않는 놈. 그게 내 로망이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엄마가 나를 키울 때보다는 잘 자라게 해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