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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Sep 26. 2023

[긴낮짧밤] 나는 도망을 희망하고 증오해

증오와 희망은 반의어가 아니지만

   증오해

   죽고 싶다. 버릇처럼 하는 농담이었다. 내일 발푠데 이제 자료 조사 시작해, 죽고 싶다. 미친, D0 맞았어, 죽어야지. 교수가 나 찾으면 죽었다고 해라… 그렇게 나는 대학 생활 기간만 추산해도 천 번쯤 죽고 싶고, 죽어야 하고, 예수님 뺨치게(신격 모독 죄송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당연히 진심은 아니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 허구성이랄지 허세랄지, 발화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가벼운 농담이었다. 과제 제출 시기가 오면, 또 시험 때가 되면 다들 번갈아 한 번씩 하게 되는 철없는 농담.


   철없는 농담의 철저한 업보였을까? 2021년 여름부터 나는 급격하게 주저앉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참말로 죽고 싶었다. 죽음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각종 수식과 미사여구를 빼고 담백하게, 죽고 싶었다. 아니 죽고 싶었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죽기 위한 노력도 번거로이 느껴졌다. 누군가 인터넷에 써서 올린 글을 보았다. ‘죽고 싶다는 건 지금처럼 살기 싫다는 뜻이다’. 지나고 보니 익명 속 그 말이 일부 맞다고도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거센 반발을 느꼈다. 네가 뭘 알아. 죽고 싶어 본 적도 없는 게 설교하면서 우월감 느끼고 앉았네. 그 글에 내가 느낀 것은 분노와 수치심이었다. 틀리지 않은 말이 모욕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적개심을 느꼈다. 모두에게.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지하철의 누구에게, 세세한 것들을 따지고 드는 듯한 직장의 익명들에게, 나는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나곤 하는 친구들에게, 사랑과 수치심을 동시에 사이좋게 주고받았던 애인에게, 무엇보다 나에게. 모두가 지고 사는 일상의 무게를 당연히 견뎌내지 못하는 나에게. 싫어. 싫어. 넌 혐오스러워. 내가 나에게 비수를 던져댄 날들은 악몽에서 깨어난 줄 알았더니 여전히 악몽 속에 갇혀있는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그때 나는 무례했지만 솔직하진 못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떠날까 봐 무서웠으나 그들을 떠나고 싶었다.


   어디로? 아무도 나의 이름을 발음할 줄 모르는 타국? 같은 언어를 쓰는 이 땅의 끝? 삶의 끝? 질문의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때도 그랬고 근래도 그랬다. 나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겨난 깊은 상처가 여전히 속살을 벌린 채로 나무껍질 같은 피부가 덮였다. 거칠고 빳빳한, 툭 치면 부수어질 것 같은 자존심만 남아서.


   희망해

   그럴 때면 도망쳤다. 3박 4일, 4박 5일의 짧은 시간을 들여 해외로 갔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 휘몰아치는 낯선 골목을 헤매었다.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도망친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가, 저들도 내가 행복해 보이는가, 답할 수 없을 질문을 무수히 던졌다.


   얼마 전엔 대만의 가오슝으로 도망을 했다. 동행과 쓸모없는 농담을 하며 쉼 없이 웃었지만 불시에 무참하게 뇌를 찢는 걱정에 비참한 얼굴을 지었을 것이다. 동행은 마찬가지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침묵했다. 하루에 이만 보 가까이 걸으면서, 비로소 친숙해지기 시작한 강과 거리를 보면서 걱정과 불안에 떨었다. 우리는 쉬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쉬는 법을 모른다.


   인천공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는 쉴 수 있을까 기대했고 대만의 습기 어린 공기를 마시면서는 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만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는 내가 하는 일들을 내려놓겠노라고 선언했다. 인생엔 언제나 쉬어가는 때가 있고 그게 지금이란 생각을 했다. 학생 때 학기 말 시험이 끝나면 방학이 있었듯이. 직장에 휴가가 있듯이. 나는 반짝 나를 태워 결과를 내고 죽은 듯이 쉴 줄 아는 영리한 학생이었다. 다시 영리한 사람이 되리라.


   그러나. 마음을 크게 들인 결심은 다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면서 흩어졌다. 휴식은 해낸 자의 것, 이라는 생각이 지독하게 숨통을 죘다. 가오슝의 사랑의 강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것 같던 시간이 태세를 바꿔 서울에서 맹렬히 나를 밀어댔다. 늘 도망치고 싶으면서 주도면밀한 도망자조차 되지 못하는 이상한 나의 자존심이 버텨야 한다고 속닥거렸다.


   결론적으로 나는 다 놔버렸다. ‘해야만 하는 것’이었던 운동과 공부를 보내주면서 패배감을 느꼈다. 그다음엔 홀가분함을 느꼈다. 도망과 비슷한 말인 도주는, ‘달릴 주’ 자를 쓴다. 도망치는 건 멈춰 서서 회피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것도 인생을 달리는 방법이다. 나는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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