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건 어쩔 수 없지만
공포와 두려움
철학과 학부생 때 교수님이 물어온 적 있다. “자네 공포와 두려움의 차이가 뭔 줄 아나?” 다소 작위적이고 문어체 같은 말투지만 우리 교수님의 말투는 정말로 이랬다. 그는 빳빳함을 잃지 않은 머리카락을 귀 쪽으로 쓸어대며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뻔뻔함을 체득한 2학년이었으므로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얼버무리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그와 똑같이(그러나 공손히) 묻겠다. 당신은 공포와 두려움의 차이가 뭔 줄 아시나요.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똑같은 말이라면 왜 두 단어가 병존하지? 이런 의문을 주는 것이 철학과 교수가 하는 일이다(농담입니다). 교수님은 간편히 우둔함을 택한 학생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 생각해 보라 채근했다. 그처럼 포기하지 않는 교수님들 덕에 두뇌 사용을 거부하곤 하는 내가 얼렁뚱땅 학사를 땄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도로록 굴리고 한결 자신 없는 말투로 말해버렸다. 모르겠는데요… 그는 다시금 빳빳한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공포는 특정 대상이나 상황을 향한 것이고 두려움은 대상이 없습니다. 작은 한숨을 쉰 듯 한 건 기분 탓이었겠지.
우리는 일상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구별하지 않지만 용어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폐소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폐소두려움증이나 고소두려움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다. 우리의 언어는 생각보다 세밀하게 설계되고 구별된다.
두려움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없는 앞날을 무서워하는 것은 공포일까, 두려움일까. 구체적 상황에서 최악을 가정하며 갖는 감정은 공포일 것이다. 억지로 갖다 붙이면 ‘절망공포증’, ‘무기력공포증,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공포증’ 정도가 아니려나. 그러나 그 모든 절망 또는 무기력이 덮치는 상황은, 폐소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처럼 특정 상황이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갖는 마음의 짐은 대부분 두려움이다.
종종 상상한다. 내 두려움의 실체를. 나는 내가 넘어질까 봐 무섭다. 나의 삶이 나를 가생이에 떨구어놓고 비틀대며 질주할까 봐 무섭다. 심연 속에 잠들었어야 마땅할 자아가 꿈틀대며 나를 지배할까 봐, 나의 추한 민낯을 직시하지 못할까 봐… 내가 나를 망가뜨릴까 봐. 계속되는 ~까봐의 망상 열차는 두려움을 향해 칙칙폭폭 달린다. 속도를 올린다.
우리는 흔히 절망을 터널로 비유한다. 어둡고 축축하고 언제까지 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터널. 언젠가는 끝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달리거나 멈추어 선다. 그러나 터널이 끝나고 새로운 터널이 나타난다면? 바랐던 밝고 따뜻한 빛 따위는 없다면? 내가 실은 터널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두려움은 끝을 몰랐다.
암흑기. 어두울 암, 검을 흑 자를 쓰는 이 말은 아주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용기를 준다. 검은 어둠을 몰아내는 데 꼭 터널의 끝만 바랄 필요 없다고 생각한 날이 있다. 작은 불을 하나 켜기만 하면 시커먼 어둠은 먹빛 그림자로 덩치를 줄여 물러난다. 불을 켜는 법. 본격적으로 랜턴을 발명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내 발에 걸린 돌이 튕겨 불꽃을 틔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극히 운이 좋았던 한 번의 스파크가 어둠을 삼키는 불기둥이 되기도 한다.
내가 벽으로 걷어찬 돌은 나를 지켜선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던 마음들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어찌나 조마조마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되주웠다. 두려움에 집어 먹히다가, 주워 든 마음을 보며 불을 켰다가 한다. 인생은, 흐느적거리는 불꽃이 깜박깜박거리는 것의 연속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