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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Jan 14. 2024

딜레마존을 버텨라!

헬스장에서 생각한 일기

   딜레마존?

   딜레마존이 뭔 줄 아시나요? 포털에 검색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신호가 바뀌었을 때 멈추려고 해도 정지선에 멈추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계속 가려고 해도 교차로를 빠져나갈 수 없어 불가피하게 신호를 어기게 되는 구간‘.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렵다는 ‘딜레마’를 따온 말인 것 같습니다. 딜레마존이 운전에 관련한 말이었다는 건 방금 검색해 보고 처음 알았네요. 저는 헬스장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PT 수업에서 오버헤드프레스를 하다가 듣게 되었습니다. 바벨을 머리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오버헤드프레스 동작은, 근육이 피로해지거나 다루기 힘든 무게를 들면 특정 부분에서 바벨이 움직이지 못하고 멈춥니다. 개인적으로는 얼굴 높이에서 어찌할 바 모르게 됩니다. 쇄골에서 출발해서 턱 높이까지는 호기롭게 밀어 올리지만, 턱부터 이마 사이에서 주춤하게 되죠. 부들부들 떨면서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정지한 이 구간에서 트레이너는 날카롭게 외쳤습니다. 밀어요! 밀어! 할 수 있어요!


   그 순간은 영원 같았습니다. 통에 꽉 차 눌러지지 않는 레고 조각의 옆구리 같은 생생한 느낌을 손바닥에 문대면서, 시간은 멈췄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모르고 서있다가 결국은 밀어냈습니다. 엉겁결에,라고 쓰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제 의지로 이겨냈다기보다는 트레이너의 계속된 목소리에 발가락을 힘껏 밟은 게 전부니까요. 멈춰있던 시간은 갑자기 배속을 돌린 것처럼 우당탕거리며 한꺼번에 흘러갔습니다. 와, 멘탈 좋다. 선생님이 어쩐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어요. 순식간에 엔돌핀이 혈관을 꽝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딜레마존을 버티세요"

    선생님은 차근히 설명했습니다. 딜레마존까지 올릴 수 있다면 반드시 밀어낼 수 있다고요. 애초에 들 수 없는 무게였다면 그곳까지 들어 올리지 못하고 떨어뜨렸을 거라고요. 우리가 딜레마존까지 올렸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어차피 할 수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라죠. 저는 저도 모르게 망연한 얼굴을 지었을 겁니다. 여러 선생님을 거쳐 대략 서른 번이 넘는 PT 수업을 받으며 포기했던 수많은 딜레마존이 기억났으니까요. 저는 누구보다 쉽게 포기하지만 누구보다 포기를 증오하는 사람이거든요. 


   제 얼굴을 읽었는지 선생님은 살짝 덧붙였습니다. 딜레마존을 버티는 건 누구에게든 정말로 어려운 일이에요. 내 한계에 가까워지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 말에 왠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만 마음 한 편으로 계속해서 내 한계에 마주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주하고 버티고 마침내 넘어서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요. 어렵지만 결국은 하고 있는 그런, 진짜 삶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삶다운 삶'. 우스운 말입니다. 누가 그런 걸 정할 수 있나요? 게다가 지난 몇 년의 저는, 버티는 것에 강한 반감을 표출하며 살았습니다. 그토록 강렬한 반감을 드러냈던 건 버티는 게 버거웠기 때문입니다. 버티는 것을 버거워하며 무너지느니 휘어지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언제나 버티는 걸 포기해 버린 스스로를 한심스럽게 여겼다는 진실을.


   또한 압니다. 버티는 쪽은 한 가지 선택에 불과하고, 휘어지는 삶 역시 훌륭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버티는 삶에 불합리에 가까운 가점을 주고, 그게 진짜 삶이라는 둥 개똥철학을 당당히 찌끄리며 집착하기 시작했을까요. 그러다가 습관적인 자학을 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등의 정신병을 얻었었는데도 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시발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답 같은 건 없겠죠. 저는 그냥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어찌 되었든 엉겁결에 딜레마존에서 마침내 바벨을 밀어 올렸던 기억은 평생 저를 따라올 겁니다. 그 순간 얼떨떨하게 느꼈던 환희와 얼얼하던 손바닥, 뜨겁게 팽창하던 혈관의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버티는 걸 포기하고 휘어지는 삶에 섰다가도 언젠가는 그 느낌을 되찾기 위해 버티는 길로 돌아올 테죠. 스스로의 미련함을 탓하면서 무수한 날 절망 혹은 무감에 팔다리를 휘젓다가 단 하루의 폭죽 같은 환희를 맛보는 나날이 저를 강하게 만들 겁니다. 적어도 연륜이 쌓인 강한 헬스인으로는 만들어주겠네요.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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