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나의 장미,

친애하는 여러분

by 밈혜윤

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S와 동물원을 갔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동물원이 있었다. 철저히 인간을 위해 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그런 곳에 나들이를 갔다. 여름날 공기에 두텁게 맺혀있던 동물들의 오물 냄새를 맡고 나들이 나온 가족과 친구들을 구경하면서 S와 사진을 찍고 까불어댔다.


누가 동물원에 가자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들떠 있었다. S의 강아지가 아직 건강했고 우린 미래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을 때였다. S와 나는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동갑내기 여자애들보다 2년 늦은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 발 늦추어졌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뭐라 설명하기는 힘든 자유로운 시야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질 날은 많지만 다시 그만큼의 자유를 맛볼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후일 S는 그날 찍은 사진 중 하나를 인화해서 건넸다. S가 고른 가장 예쁜 내 사진이었다.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하는 게 보편적인 시대에 받게 되는 인화 사진은 언제나 특별한 느낌이다. 수십 장을 일일이 보고 사진을 골라냈을 친구의 정성이 더해져서 그렇다. 증명사진 찍을 때 내 얼굴 수십 장 보는 것도 지루하고 괴로운데 어떻게 남의 얼굴을 수십 장이나 보고 골라냈을까. 나는 S의 사진 선물이 너무 기쁘고 흡족했다. 그 사진은 내 애장품 박스에 고이 잠들어 있다. 아까워서 꺼내놓지도 못한다. 아마 S는, "또 줄게! 그냥 꺼내놔!"라고 하겠지.


다른 사람과 교류하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고 사뭇 놀라게 되는데, S가 준 사진을 보면서도 그러했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내 사진과 S가 예쁘게 생각하는 내 사진이 완전히 달랐다. 이것이 나의 얼굴? 심지어 예쁜? 셀카 속 얼굴이 진실이라 믿어온 내 세계가 무너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S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얼굴까지. 얼굴만 그랬던 건 아니다.


'내 별의 그 꽃은 항상 먼저 이야기를 건넸었는데'

S는 아담한 키와 대조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을 풍기고, 또 알아갈수록 풍부한 인내심을 가졌다. 가까운 친구가 되기는 어렵지만 막상 가까워지면 많은 것을 용인하고 이해해주고자 한다. 또 S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종알종알 말을 잘한다. 대화를 만들어내는 수고로운 노력을 한다. S와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까르르 웃게 된다.


S는 합당치 못한 처우에 분개했다. 그 처우가 S 자신을 향한 것일 때보다, S의 친구들이 타인의 무례함을 용인할 때 더 큰 분노를 표했다. S는 우리에게 스스로 받아 마땅한 대우가 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S가 모든 걸 다 허허실실 웃으며 받아주는 건 아니다. S는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전형이기 때문에 여러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고, 우리의 실언이나 실수에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많이 사람 됐다.


S를 생각하면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속 장미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메아리만 치는 사막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자기에게 말을 걸던 한 송이의 장미를 떠올린다. 이어지는 여행에서 수천 송이의 장미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져 울어 버린다. 평범한 장미 한 송이와 자그마한 화산을 가지고는 위대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울던 어린 왕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곧 깨닫는다. 유리 덮개를 씌워주고 말을 나눈 시간 때문에 그 장미는 특별한 단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어린 왕자는 어른 왕자가 되었을 거다.


S는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이어갔다. 목이 메어 질질 짜는 우리가 더 상처 입지 않게 유리 고깔을 씌워줬다. S는 나에게 시간을 많이 냈고, 외롭게 만들지 않았고, 내 양심 없는 카톡 답장 텀을 꼬집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S의 장미라고 할 수 있겠다. S를 만나는 날이면 설레고 신났다. S와 친구들이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은, 비속어를 제하면(카톡방에서 최다 단어 1~5위를 꼽았는데 모조리 차마 적을 수 없는 비속어였다!) 다음의 문장과 같다. "진짜 잼민이(어린이 비하 아님) 같다..."


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서로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고 편안한 관계에서는 아이처럼 굴게 된다고.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말, 지금 너랑 내가 하는 말들이 유치해 죽겠다는 말은 관점에 따라 사랑스럽고 포근한 말이 아닐지? 거창하게 심리학에 다가설 필욘 없다. 중요한 건 S 덕분에 정말 즐겁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스스로의 대우에 많은 생각을 한 날을 보냈다는 것. 앞으로도 우리 서로 유치한 말을 주고받길. 탑 5에 들어가는 비속어들을 나이 들어서도 우리끼린 자연스럽게 하는 사이이길.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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