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가끔 F들을 울리는 T

친애하는 여러분

by 밈혜윤

C는 은은하게 돌아있다

내 기억에 C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과외도 하고 동아리도 하고 대외활동도 하고 복수 전공도 하면서 여행과 어학 연수를 고루 다녀온 광공이다(광공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쓸데없는 인터넷을 덜하는 생산적이고 고고한 일상을 살고 계시다는 방증입니다) . 내가 C처럼 온종일 바쁘게 불살랐다면 술은 커녕 방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안 했을 텐데, C는 거의 매일 술자리에 성실하게 출석 도장을 찍었다.


C의 일상, 술자리가 인상 깊은 까닭은 C의 광기를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술자리였기 때문이다. C는 세상에서 제일 술이 고픈 얼굴로 술자리에 착석했다. 테이블에 누가 있는지 크게 관여치 않는 얼굴로 앉았다가 재미 없으면 3초 만에 일어나서 떠나 버렸다. 다행히 나는 C의 바람 같은 퇴장을 직접 경험한 적 없지만, 옆 테이블에서 건너다 본 적은 있다. 그런 일은 꽤 비일비재했다. 나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인상이 깊다. 재미 없는 술자리에서 내적 하품을 참아내곤 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났다.. C는 학업도 술도 웃음도 워커홀릭처럼 해냈다.


우리는 서로 팝콘 같은 사이였다. 영화 볼 때 팝콘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C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직접 대화는 안 하지만 다른 테이블에 앉은 C의 얼굴을 설핏설핏 살피고. 야야, C는 쟤랑 무슨 얘기할까?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아 가서 물어보기엔 좀 그래... 뭐가 ‘좀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C가 하던 대외활동이 뭔지는 잊어버렸지만 C의 여행지는 기억하는 사이, 직접 약속은 안 잡으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쭈뼛하게 근황을 묻는 이상한 사이.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당연히, 이건 나의 일방적인 기억이다.


우리의 거리감은 학교 다니는 내내 있었다. C는 앞서 말했다시피 항상 바쁘고 바빴다. 그리고 언제나 텐션이 높았다. 30대가 된 지금보다 체력이 딸렸던 20대의 나는 학교에 도착하는 즉시 지쳤었다. 항상 지쳐있던 나에게 C의 흥은 다소 부담이 됐다. 게다가 재미 없으면 벌떡 일어나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C의 호쾌함 때문에 왠지 최선을 다해 C를 웃겨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농담을 던져 봐도 항상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의 C는 아리송했다. 그래서 나는 C에게 다가서길 머뭇댔던 것 같다.


T는 가끔 F를 울려

세월이 흘러 우연한 일로 우리는 좀 자주 연락하게 됐다. 알고 보니 그 아리송한 얼굴이 C가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었다. 의외로 그 친구는 웃음의 장벽이 낮고 쇼츠를 즐겨 보는, 나처럼 팝콘 두뇌를 가진 인간이었다. 역시 타인을 향한 편견은 타인에게서 직접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C는 mbti에서 아주 강력한 T 기질을 갖추었다. 우리는 성격유형검사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끼워넣기 위해 다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 약간의 과장과 일반화를 갖추어야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됨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여하튼 C는 '파워 T'지만 주변의 울보 F들에게 맞춰주기 위해 굉장히 애쓰는 깜찍함을 갖고 있다. 그의 노력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F들은, 내가 아는 한 가장 T스러운 C를 애껴 소매에 넣었다. 나 또한 멀직이서나마 C를 좋아하는데, 작년 내 생일 즈음 C를 더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한 살씩 먹을수록 생일은 묘하다. 축하해 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잊어버리기도 하고, 축하해 줄 거라고 생각지 않은 사람들이 연락을 준다. 카카오톡 선물하기 위시리스트에 채워 넣은 물건들이 선물로 오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그렇기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좋았던 선물들이 당도했다.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람들이 늦게나마 연락을 줬다. C는 그중 하나다.


C가 보낸 생일 메시지를 인용하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상 나아가는 OO 응원하고, 멈춰있는 OO도 졸라 멋짐. 서로 부대끼면서 재미나게 지내자”. 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버스를 타고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바쁜 길도 잠시 잊고 눈물을 살짝 닦았다. 나는 C가 재밌고 신기하지만 무미건조한 전형적 T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023년 생일에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그였다.


하긴, C가 무미건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또 다시 나의 착각과 편견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늘 두 걸음 정도 멀리에서 C를 지켜봤으니. C가 나에게 눈물을 짜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재미난 일이었다. 사는 건 늘 예측을 벗어나는 사건들, 사람들, 사사로움들로 가득하다. 그런 게 사는 맛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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