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여러분
웃수저이자 재주가 많은 나의 L
L은 정말 재미있는 친구다. 어째 내 친구들 소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재미있다'인 것 같은데, 재미를 기준으로 사람을 갈라 쳐 사귄 탓에 재미없는 친구들과는 우정을 쌓지 못했다. 물론 재미란 건 지극히 주관의 영역이다만 ‘보편적으로’ 재미를 인정받는 사람들의 재미없는 친구, 그게 바로 나다. 골라 사귄 친구들 중에서도 L은 각별히 웃기다. 말에 특별한 고저나 허풍 가득한 부사를 붙이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평평하게 이야기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하게 된다. 말에 MSG와 밈, 재롱을 한참 섞어야 간신히 사람을 웃기는 부류인 나는 L이 물고 태어난 웃수저가 10년 넘게 부럽다.
L은 재주가 많다. 눈물 쏙 빠지게 웃게 만드는 것 외에도 신기한 노래를 엄청 많이 알고, 그보다 많은 가사를 외고, 피아노를 잘 친다(피아노는 아닐 수도 있음). 문단을 나누지 않아도 이상하게 빨려드는 글을 잘 쓰고 그 재주를 살려서 살고 있다. L의 호흡이 긴 글을 읽을 때 봄날의 밤바람이 얼굴을 살며시 긁어주는 듯한 기분이 나를 푹 적셨다. 그 기분은 질투 한 소큼을 동반하곤 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L의 면모들. 그래도 시심은 다정한 L 앞에서 금세 자취를 감췄다. L은 유머 감각만큼이나 존재감이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입술이 큼직한 하트 모양이라서 L이 립밤을 바를 때면 아닌 척 뚫어져라 쳐다봤다. 웃을 때 더 크고 양 머리가 뾰족한 하트가 되는 L의 예쁜 입술. 입매를 뾰족하게 만들지 않고도 정말 웃긴 이야기를 던져대는 L의 입.
L은 성대모사를 굉장히 잘한다. 인간 복사기 수준이다. L이 교수님을, 친구들을, 모 여성 래퍼들을 따라 할 때 B와 S와 나는 눈물 나도록 신나게 웃었다. 성대모사를 잘하려면 관찰력이 뛰어나야 할 텐데 아마 관찰력이 L의 재주, 그러니까 성대모사와 글 솜씨, 타인을 비난하지 않는 태도를 구성하고 있으리라. L은 우리 눈 밑에 엉겨 붙은 피로와 혐오감과 절망에도 기민했다. 주머니에서 쑥 나오던 빵. 초콜릿. 농담. 같이 가면 좋을 카페의 목록. 패키지여행에서 작은 깃발을 들고 앞장서 걷는 가이드처럼 우리를 진두지휘하던 L과 걷던 성수의 거리들이 조금 전 일처럼 파닥거린다.
그러고 보니 L에게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L이 웃기지 않은 적이 있던가? 없다. L에게 고민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쪽에서 늘 뭔가를 투덜대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마냥 나는 고민이나 울화통을 L에게 싸들고 가서 한바탕 걸진 성대모사와 웃음으로 바꾸어 왔다. 쓰다 보니 내 인성이 굉장히 의심스럽다. 나는 L에게 어떤 것을 주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L은 재주도 많고 사랑도 많은 사람이다.
아이스크림 하나의 부끄러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아이스크림 같은 극도로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굉장히 지쳐 있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날은 무더웠고 카페 에어컨은 고장 났으며 술에 진탕 취한 손님이 많았다. 프랜차이즈 특성상 물어야 하는 여러 가지 질문에 손님들이 대꾸해주지 않아 묻고 또 묻느라고 예민해진 날이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는데 그만 L과 함께 있던 단체 톡방에서 예민하게 성질을 부렸다. 무슨 일인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말을 가지고.
갑작스레 짜증을 뒤집어쓴 사람이 짜증 낸 사람을 달래주는 확률을 구하라면 0에 수렴할 것이다. 같이 짜증 내고 싸울 확률이 대략 50%를 넘지 않으려나. L은 너그러웠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다정하게 알바가 몇 시쯤 끝나는지 묻곤 지하철 역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그때 우린 둘 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사주겠다면서. 나는 몹시 머쓱해졌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켕긴 마음에 L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L에게 콘 아이스크림을 하나 얻어먹고 내 자취방까지 함께 걸었다.
L은 춤추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과제 얘기, 같이 아는 다른 친구 얘기, L의 아르바이트 얘기. 나의 날 선 태도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음으로써 오래도록 그날을 골똘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있는 대로 꼬라지를 부린 날이면 한여름의 왕십리가 떠오른다. 날이 더워서 아이스크림은 줄줄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딴 얘기를 하다가 끝내 짜증을 사과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사과마저 하지 못했던 나의 쪼다 근성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한순간에 표층으로 떠올라버린 찌질함이 노엽다.
나는 너를
L은 의도치 않게 가끔씩 나를 몰아붙였다. 이 글을 읽는 L은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들어봐.
L이 활달하게 성큼성큼 미래로 나아갈 때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버스전용차선에서 후웅, 시끄럽게 방귀를 뀌고 달려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정체된 차선에 앉아 애타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는 풍경이 멈추어 선 도로에서 내가 탄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애처로운 세발자전거였다. L이 외국에 나가서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사회인으로 무럭무럭 클 때 나는 집구석에서 누워만 있었다. 2년 동안 도피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L이 나에 대해 무엇을 볼까 궁금히 여겼다. 수년 전 내가 되지도 않는 성질을 부린 날 아이스크림을 사줬던 L이 이제는 나와 거리를 벌리고 있을까 봐 무서웠다. 딱히 L에게만 품었던 두려움은 아니지만 L에게 유독 들끓었던 까닭은 그날의 실수가 컸다. 그리고 L을 좋아하고 동경했던 마음도 다루어지지 않을 만큼 컸다.
L은 실은 그런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아는 다정한 성정의 L이라면 자기의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줄까 봐 조심히 물러나 있었을 뿐일 텐데. 그렇게 작아졌던 시기엔 스스로 찍어 누르고 상처 주려는 자기 파괴적 망상에 불과한 걸 알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나의 구겨진 마음을 L은 (또한 의도치 않게) 손으로 싹싹 눌러 펴주었다. <친애하는 시리즈>의 들어가는 글에서 나온 친구가 바로 L이다. 손바닥만 한 햇볕이 따갑던 성수의 어느 카페에서 내 마음에 종을 땡- 쳤던 인물 말이다. 너는 네가 내 인생에 경종을 쳐준 줄도 모르고 오늘도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눈이 시리도록 보고 있을 테지. 퇴근해서는 건강한 그릭요거트와 아보카도 같은 걸 먹겠지.
사는 건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다툼이다. 변화는 결국 스스로가 결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타인이 조금 편 들어주고 도와줄 순 있다. L은 벌써 최소한 두 순간 내 편이 돼줬다. 나도 내 편을 들지 못했을 때 L은 내 무거운 엉덩이를 밀어 올려주었다. 내가 L에게서 찾아낸 가장 반짝이는 부분이다. L은 아는 노래도 많고 글도 잘 쓰고 성대모사도 잘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좋아할 수 있을 구석을 찾아 슥삭 닦아 광을 낸다. 네가 닦아준 마음으로 나는 <친애하는 여러분> 시리즈를 차곡히 완성해가고 있다.
3년 전 즈음 이 글의 초안을 L에게 보여줬었다. L은 웃음기 가득한 카톡을 보냈다. 뭘 그런 걸 아직도 미안해하고 있어. 나는 잊어버렸던 거 있지. 그러게, 답장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날의 무안함을 생각할 것이고 때때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잠깐 침울해하다가, 다시 네가 내게 줬던 힘을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