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나는 네가 되고 싶었어

친애하는 여러분

by 밈혜윤

나의 몇 안 되는 동갑내기 친구

이상하게 가깝게 지내는 연상, 연하는 많지만 동갑내기는 손에 꼽는다. 은근히 어린 사람이 조금 더 참게 되는 유교적 사회 분위기 아래, 내가 연하 친구들에게 군림하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다. 하여간 몇 안 되는 동갑내기들중에서도 K는 각별하다.


K는 서글서글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누구를 붙여놔도 웃길 수 있을 것이다. 남을 깎아내리는 불쾌한 웃음이 아니라서 더 즐겁다. 평범한 일상을 본인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소화한 K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궁금하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다 보면 안 좋은 점이 필연적으로 돋보이지만 내 눈에 K는 무결하다. 남을 위하고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의 에너지. K는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남들에게도, 나에게도.


내 착각일지라도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어.

K를 처음 알게 된 건 스물둘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같은 동아리에 몸 담았다. 중간 기수로 들어온 K는, 중간에 합류하는 사람들의 어정쩡함이 없었다. 이미 끼리끼리 친해진 관계에 새로이 끼어들기란 어렵고, 그걸 알기에 다들 주춤댈 수밖에 없지만 K는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어디에건 쏘옥 끼어 들어갔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내 눈에 비친 K의 장점은 내 결핍이기도 했다.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어떤 사람인지 간을 보면서 일말의 결론을 내려하기 때문이다. 잘 맞는 것 같지 않으면 뒤로 발을 빼고 잘 맞는 것 같으면 성급히 친밀함을 갈구하는 나로서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K가 몹시 좋았다.


K와 나는 통하는 게 많았다. 우리는 동갑이었고, 비슷한 분위기의 집에서 비슷한 형제 관계를 가지고 비슷하게 자라났다. 상황들을 맞닥뜨릴 때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다. 여러 가지 공감을 다져가며 나는 K가 더욱 좋아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아도 다음날 겸연 쩍지 않았다. K의 장난스러운 윙크에는 다 제자리를 찾아간 이야기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워낙 잘 맞춰주는 K의 됨됨이를 볼 때마다 우리의 공감들이 진심이었는지, K의 뛰어난 사교성의 일환이었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시간은 마음껏 흘러 K를 안 지 9년째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의 공감들이 과장과 재치 섞인 반쪽짜리 진심이었어도 상관없게 되었다. 그건 그거대로 진실이 되었다.


나는 네가 되고 싶었어.

K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무던한 관계도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K와 나는 사랑인지 우정인지 아리송하게 들끓는 관계였던 적도 없지만 좋은 부분과 싫은 부분의 대차를 그려본 적도 없는, 무던히 좋은 관계였다. 9년 동안 우리는 편지를 한 통인가 주고받았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불나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는 분기, 또는 반기 별로 꼬박꼬박 만났다. 내가 가장 힘겨울 때도 K의 연락은 미루지 않았다.


앞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나 편하자고 연락을 미루고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K를 질투한 순간은 흐릿한 꿈 같다. 좋아하는 친구를 질투하는 내 마음이 너무 미워서 용납이 안 되는 언젠가가 있었다. 이 모든 가정이 사실이라 손 쳐도 K는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랬구나, 너는 그랬구나." 머리칼을 휘저으며 씩 웃고 말 것이다. 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하면서도 불쾌하지 않을 것이고 반겨주는 K의 얼굴을 따라서 의기양양 웃고 있을 것이다.


K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고, 공감과 칭찬과 대안을 아낌없이 드러내 놓는 사람이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회사에서도 그런 기량을 살려 쭉쭉 성장 중이다(사실 회사에서 K가 어떨진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다). 본인에게 엄격한 K는 본인에 대해 쑥스러워 하며 말을 아낀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K라면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뾰족하게 티가 날 것이고, 적어도 후배들이 닮고 싶은 멘토에 가까우리라.


K 같은 상사라면 후배의 비언어적 제스처를 읽어낼 것이다. 후배가 하찮아서 말하기 멋쩍어하는 고민을 하찮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얘기를 들어주고 웃겨줄 것이다. 아마 K는 정말로 후배들에게 그런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K는 학부 시절에도 그런 걸 도맡는 캐릭터였으니까. 천성이 그런 걸 외면하고 내팽개치는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사람들이 다가와 얘기를 하게 만드는 K의 매력은 '쿨해보이지만 따뜻한 도시여성'인걸까? 나도 그런 걸 갈망했다. K와 이야기 나누고 싶었고 나아가 K의 그런 매력을 갖길 소원했다.


나는 K만큼 에너지로 똘똘 뭉친 매력적인 인싸의 삶은 포기했다. 네가 되고 싶었던 때, 너를 면밀히 관찰할 때,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알아챘다. 우리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주고 받는 것으로 인생은 충분히 즐거웠다. 어쨌든 K도 꽤 나를 좋아라 했다. 아직도 K가 되고 싶냐고? 그건 K가 나를 싫어하게 되면 생각해봐야겠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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