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우리의 가장, 내 최후의 보루

친애하는 여러분

by 밈혜윤

친한가? 아닌가?

P에 대해 쓰려고 가만히 앉아 생각하다 보니 혼란스러웠다. P와 나는 분명 가깝지만, 둘이 친하냐고 물으면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친하다'의 기준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친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 반대다. 여럿이 있다가 누가 화장실에 가는 등의 이유로 둘만 남겨지면 적막 속에 음료를 마시고 컵을 만지작대는 사람들.


하지만 나와 P는 굉장히 가깝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자주 어울리던 두 친구가 마침 P와 친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P의 첫인상은 '재미없음'이었다. P의 농담이 재미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와 P, S, Y(싸이가 아니다!)가 처음 같이 술을 마시며 놀던 날, P는 거의 말이 없었다. 내가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실은 나도 그 친구에게 낯을 좀 가렸다. 실은 최근까지 가렸다. 둘이서는 잘 볼 일도 없었고 볼 생각도 크게 있진 않았다(P야 미안해, 그렇지만 너도 그랬지?). P와 나는 뜬금없게도 나의 동생 M이 그와 친해지면서 전보다 큰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어림 잡아 7년쯤 알고 지냈지만 내가 P의 요모조모를 알게 된 건 최근 1년이었다. 역시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알 때 애정을 갖게 된다.


커다란 덩치와 섬세한 마음.

P는 키와 덩치가 매우 컸다. 둘 중 하나만 큰 사람은 왕왕 봤지만 둘 다 커다란 사람은 흔치 않아서 강하게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 탓에 나는 P를 실재보다 부풀려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P와 밥 먹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저 덩치에 어떻게 저만큼만 먹고사나'였다. P는 덩치에 비하면 소식가였다. S와 나는 모임 때마다 "쟤 집 가면 우리 몰래 라면 이만~큼 끓여서 먹을 거"라고 말했다. 농담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P는 긍정도 안 했지만 부정도 안 했다.


P는 조금 무섭게 생겼는데 의외로 농담을 즐겨하는 사람이고, 꽤 타율이 좋은 편이다. 어디 가서 예민함으로는 뒤처지지 않는 예민 보스 삼대장인 S, Y, 그리고 나는 P의 농담에 껄껄 웃으며 만족스럽게 음료(넷이 모이면 높은 확률로 술이었다)를 들이켰다. P의 농담에는 불편함이나 찝찝함이 들러붙지 않아서 우리는 순도 100%의 웃음을 뱉곤 했다. 하지만 우리 예민 삼대 천왕이 P와 잘 어울려 다닌 건 그가 웃겨서만은 아니었다.


예민하다는 건 불편함에 민감하다는 말이다. 나와 S와 Y는 타인을 면밀히 관찰하고 일정 선을 그어놓는 습관이 있다. 서로를 불편하지 않게 지키는 거리다. 우리 셋은 자기가 선을 넘을까 봐 염려하는 사람이고, 타인이 타인의 선을 넘는 것 같을 때 부쩍 긴장했다. 경계가 파괴되는 것 같을 때 괜히 마른침을 삼키는 우리는, 그래서 셋이 친했고 또 그래서 P와도 친했다. P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깍듯했고 농담할 때도 그의 눈썹만큼이나 섬세하게 선을 잘 지켰다. 우리가 궁금해 죽겠다며 캐물어도 남의 이야기를 절대 옮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야기도 P를 통해 흘러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P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다.


우리 내심의 가장家長.

P는 일찌감치 로스쿨 진학을 선언했다(적어도 나와 알게 된 뒤부터).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고개를 주억대며 그럼, 너 같이 똑똑한 애가 로스쿨을 가야지, 네가 잘 되어서 우리를 채용하고 먹여 살려야지, 말하곤 했다. 팍팍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의 최후의 보루이자 가장이 되어 달란 농담이었다. P는 우리 넷 중 제일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았다. 수업시간에 똑같이 필담을 나누며 딴짓(엄마아빠 죄송해요) 한 것 같아도 치사하게 혼자만 A0 이상을 맞던 배반자였다. 정확히 말하는 게 좋겠다. 나만 배반당했다. S도 Y도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성실한 친구들이었다.


우리 아빠는 가끔 P가 변호사 되었느냐고 물어온다. 아빠가 물어올 때마다 놀란다. 벌써 P가 로스쿨에 진학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났다고? 내가 또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고?... 내 화려하고 우중충했던 젊음이 노쇠해 가는 기분은 슬프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점차 느슨하고 단단한 사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좋다. P가 어서 진짜 변호사가 되면 좋겠고, 홀랑 결혼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결혼할 거라면 S나 Y와 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있다. 셋의 의사는 무시한 본문이다. 내 관심사는 기가 막히게 이기적으로 우리 넷의 오랜 우정뿐이다.


얼른 변호사 돼서 필요할 때 법적 조언 좀 해달라고 하면 P는 새침하게 말했다. 자기 상담비는 비싸다고, 지인 할증 붙일 거라고. 가장씩이나 돼서(물론 또다시, 그의 의사는 무시한 말이다) 잘도 그런 말을 조동이로 뱉던 P는 변호사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공부를 안 해서 붙어도 자격증을 반납할 거라는 둥, 아직 남의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안 됐다는 둥, 역시나 학부생 때처럼 이상한 말만 지껄이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공부를 더럽게 안 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합격하기를 몹시 바라고 있다. 그는 내 인생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농담이야. 아니, 진담이야. 하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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