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있는 채널 시즌4 2화 일부
<멋진 신세계>와 <시녀 이야기>, 문명과 자유
장르문학'이라고 하면 보통 뭘 떠올리시나요? 저 같은 경우는 SF물, 역사물이 주로 생각납니다. 특히 science fiction 쪽으로 많이 생각이 나는데요. 또 워낙 SF 쪽을 재밌어하기도 하고요. SF 소설의 아버지로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있습니다. 또 <1984>의 조지 오웰 역시 굉장히 유명한 작가죠. 한국은 김초엽 작가가 잘 쓴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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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오늘 제가 들고 온 sf소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입니다. 이 작품을 이야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문명이란, 그리고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워낙 소설이 길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크립트를 쓰면서 아, 이거 잘못 골랐는데... 하는 절망을 많이 느꼈습니다. 분량 조절을 잘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 했습니다!
아참, 제 스크립트에는 결말이 살짝 언급됩니다. 이 작품은 1932년에 출판된 작품이기 때문에, 왜 스포 하냐고 화를 내신다면 곤란합 니다. 마치 <성경>에 예수가 죽었다고 해서 스포가 될 수는 없는 것 같은.. 무슨 말인지 아시죠?
사람을, 통조림처럼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멋진 신세계>는 사람을 완벽한 계산 속에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는 AF, after Ford 632년의 런던입니다. 포드는 안정적이고 안락한 문명을 완성한 과학자이고, 그의 이름을 따서 시대를 구별하고 있으니 거의 예수 취급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이 문명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개념이 낯선 것을 넘어 아주 외설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크게 알파, 델타, 감마, 엡실론 등의 계급으로 나뉘어서 만들어지는데요, 계급에 따라서 수정란을 생성시키는 과정도 달라지고, 받는 수면 교육이나 경험, 하는 일이 다 달라집니다. 이 모든 배양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계획된 것입니다. '수면 교육'은 뭐냐면요, 자는 동안 계속 틀어주어서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방송 교육을 이릅니다.
알파 델타 감마는 많이 들으셔서 아실 테니 설명은 패스하고요. 엡실론은, 수학에서 매우 매우 작은 숫자를 표현할 때 쓰는 그리스의 알파벳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엡실론이란 사회의 작고 잡스런 일을 도맡아서 하는 하층 계급을 말합니다. 사람을 만들어내는 과학자 집단은 엡실론 계층에게 지성은 불필요하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하고, 거의 무슨 인간성이 거세된 로봇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알파 혹은 델타, 즉 상층 집단이 받는 수면 교육의 한 구절을 읽어드릴게요. "모든 사람은 타인을 위해서 일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엡실론도 쓸모가 있다. 우리는 엡실론 없이는 지낼 수 없다..." 조금 기괴하죠.
겪어야 할 일
개체수와 속성을 완벽하게 조절해서 사람을 만들어내는 이 기막힌 문명은, 평온하고 안락합니다. 고통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겪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소마'라고 하는 일종의 진정제를 매일 먹으면서 쓰러져 자고, 행복하게 약에 취해 있다가 아무런 부작용 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실로 돌아오면 되거든요. 소마Soma는 고대 인도에서 베다시대의 종교 행사 때 마시는 음료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소마를 마시면 적에게 승리할 수 있는 힘, 또 시적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고대 인도인들은 믿었죠.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원래는 이 문명 안에 있던 여성 린다가 '보존지역 내 야만인들 사이에 버려졌다가, 그녀가 야만인 부족에서 살며 출산한 아들 "존"과 함께 포드의 문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여성은 오랜만에 맛보는 소마에 거의 절여져 잠깐 살다가 죽습니다. 마약 중독을 연상케 하기도 하죠. 존은, 아주 우연하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접하고 그에 폭발적인 시적 영감을 얻어서 내적인 고찰을 많이 하는 인물입니다. 야만인 출신이라서 'Mr. Savage'라고 불립니다. 존은 거의 말 끝마다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데, 이 문명에서 셰익스피어는 금서입니다. 왜일까요? 왜 고도의 문명은 시적인 작품들, 예술, 종교를 거부하게 했을까요?
감히 제가 텍스트를 읽어 정리한 바로는, 그런 풍부함을 향유하는 것은 고통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이 문명은 인류를 대단히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 불행을 거세시켰습니다. 죽음의 공포, 노령의 외로움, 사상이 다른 사람들과의 부대낌, 폭동 같은 부정적인 경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죠. 미스터 새비지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건 부당하지 않느냐고요.
미스터 새비지는 끝끝내 문명을 거부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명은 끊임없는 취재, 녹화와 보도, 끝내는 관광 상품을 만들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결국 미스터 새비지가 자살하는 걸로 마무리됩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졌을까요? 저는 그랬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겪는 가장 거대한 공포는 죽음의 공포가 아닐까 하는데, 완전히 알 수 없는 그 길로 성큼성큼 들어간 거니까요.
마찬가지로 문명과, 문명이 가르치는 강력한 도덕, 그 안에서 인간의 자유를 다른 작품은 1965년 출간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 야기가 있습니다. <시녀 이야기>는 20세기 후반 핵전쟁 이후 도래한 사회문명을 상상으로 그린 작품인데, 재밌는 건 1932년 작품인 <멋진 신세계>보다, 아니 웬만한 중세 뺨따귀를 후려칠 정도로 폐쇄된 사회를 그립니다.
이런 SF물에서 미래 인간은 극과 극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모든 고통에서 놓여나서 생각 없는 꽃밭 대가리로 사는 모습 아니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는 모습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파란 약 먹고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여기 있을래, 아니면 빨간 약 먹고 잔혹무도한 진짜 현실을 볼래? 하고 묻는 것처럼요. 현실의 우리가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기 때문일 텐데요, 그래서인지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조금 더 잘 쳐줍니다.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말하는 격언이 너무너무 많잖아요?
저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고통으로 성장한다는 둥,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둥의 격언을 주워섬기고 살지만... 고를 수 있다면 미스터 새비지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고통을 피하고 사는 게 나쁜 건 아닌 것도 같고요. 다행입니다. 전공 수업 때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게 인간다운 삶이 맞냐, 뭐 이런 질문이 0.1초 만에 오백 번은 나왔을 겁니다. 정말 고통스러울 뻔했네요. 물론 지금도 저는 분량 조절을 못해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일단 마무리할게요. 여기 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