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헬스일기
휴식
지난주에 심하게 감기 몸살을 앓았다. 월요일엔 아파도 꾸역꾸역 PT 수업을 갔다. 사실 온전히 의지의 영역만은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당일 취소가 안 되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노예근성은 돈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내 말이 아닌 꼴을 보고 트레이너는 깜짝 놀라서 아니 회원님! 이렇게 아프시면 쉬셔야죠! 했다. 나는 당일 취소가! 안 되잖아요! 하고 받아쳤다. 기가 막힌 얼굴로 벙쪄있다가 그는 강하게 말했다. 때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쉬어야 됩니다. 그답지 않은 강한 어조였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화요일과 목요일 운동 모두 취소했다. 정말로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계속 머리에 남았다. 때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쉬어야 됩니다.
평균 주 4회 이상 방문하던 헬스장을 일주일 동안 가지 않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사이에 홀랑 근손실이 날까 봐 근심스럽기도 짜증스럽기도 했다. 운동을 하던 시간을 아껴서 다른 ‘평화로운 행동’, 이를테면 글쓰기나 영화 감상 등에 쏟아 보려고 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몸은 점점 몹시 나쁜 상태로 치달았다. 수요일과 목요일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금요일엔 열두 시간을 잤다. 그러고도 토요일에 간신히 살 만한 상태에 도달했다. 아픈 것 치고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잘 먹었음에도 일주일에 3kg가 빠졌다. 하지만 몸무게 숫자 놀음에 속지 말자. 떠나라는 지방은 안 떠났을 것이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아파도 할 건 해야 하는데, 따위의 생각들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럴수록 트레이너의 말이 왱왱 메아리쳤다. 때로는 그래도 쉬어야 됩니다. 나는 정말 내가 쉬는 꼴을 못 본다. 물론, 쉬는 것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쉬지 않고 뭔가를 하는 척하면서 중간중간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일엔 관대한 모순적인 행동을 곧잘 한다. 그 기저에는 내가 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다.
3대 운동의 리프팅 중량을 키우려면 휴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일명 ‘스트렝스 프로그램’을 6~8주 진행한 후나 1RM을 측정한 후 약 2주 정도는 무게를 확 낮춰서 운동을 살살해야 한다고. 쉼 없이 중량을 올리면 몸은 비대해지겠지만 3대 중량은 지리하게 머물러 있단다. 그 이유를 트레이너가 논문을 언급해 가면서 자세히 말해준 것 같지만 까먹어 버렸다. 어쨌든 그렇게 무게를 깎아 사실상의 휴식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계속 스트레스를 주고 가혹하게 몰아붙여야 몸이 더 잘할 것 같았는데. 너무 한국식 쥐어짜기 사고방식인가?
RPE
스트렝스 프로그램은 PT 수업 외에도 개인 운동으로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과제에는 조건이 있다. 바벨 운동은 RPE(Rating of Perceived Extersion) 7 수준으로 유지할 것. RPE는 쉽게 말하면 운동의 강도를 스스로 메겨보는 것이다. RPE 숫자가 9나 10에 도달하면 죽을 것 같이 괴롭고 힘든 강도를 말한다. RPE 7는 동작을 5회 수행하고 2~3회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상태다. 내 몸인데도 2~3회 여유를 두고 수행을 조정하는 게 낯설고 어렵다. 반면 덤벨이나 원판, 머신을 활용한 보조 운동은 RPE를 9 수준으로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최선을 다 해 쥐어짜란 뜻이다. 여태까지 해온 운동의 방식이라 이쪽이 더 친근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마음이 잘 안 든다는 단점이 있다.
RPE 7 수준을 잘 유지한 뒤의 느낌은 상쾌함이다. 분명히 바벨에 원판까지 꽂아서 적지 않게 운동을 했음에도 있는 대로 쥐어짜고 털어내던 방식의 운동을 했을 때와 달리 한결 개운하고 상쾌한 상태로 헬스장을 나오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중량의 증량이 되는 게 맞나 갸우뚱하던 순간이 무색하게 다음날 몰려오는 근육통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음. 스트렝스 프로그램이 아주 제대로 되고 있군. 이런 소감을 말하자 트레이너는 예의 치아가 반짝이는(=사악한) 미소로 말했다. 아무래도 회원님은 헬창 변태니까. 변태라는 단어의 어감이 사회적 통념상 좋지는 않지만 이런 변태라면 기꺼이 하겠다.
운동의 강도를 가늠해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우리는 종종 가늠해야 한다. 체중과 중량, 사회성, 감정. 특히 고통. 나의 것을 가늠할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의 다른 사람들 것까지 따져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참는다. 침묵한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나만 힘드냐, 다 힘들어. 고통에 둔감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삶은 자꾸 RPE 10으로 뛰어오른다. 외면했던 나의 고통, 가족의 고통, 친구와 지인들의 것이 스친다.
원하면 알 수 있는 것과 원하든 원치 않든 알아야 할 것은 다르다. 한국 사회는 보다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정신적 고통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축되면 얼마나 좋을까? RPE 6~7 정도의 일상이라면 사람들은 좀 더 행복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좀 부딪쳤다고 인상을 잔뜩 쓰진 않을 것이다. 시험 좀 떨어졌다고 스스로를 절벽에서 낙마시키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기를 더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거시적으로 새 버렸지만 RPE 계산을 하면서 닳도록 생각했다. 나의 고통에 예민할 것. 나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을 것. 적정 수준을 넘어서지 않도록 항상 조절할 것. 이따금씩은, 쉬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