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여러분
내 단짝
M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말이 많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한동안 내가 달고 살았던 말은 "조용히 좀 해", "말 좀 그만해"였다. 어릴 땐 내가 그렇게 말하면 좀 기가 죽는 듯도 했지만 이젠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조금 기가 죽어도 괜찮으련만. 그런 M과 내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살았던 때도 있는데 하필 그때 M은 학교에서 도둑으로 몰리는 억울한 일이 있었다. 등교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가 하교 후 영어 학원 선생님하고만 이야기했다고 한참 후에 밝힌 적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 시기에 M의 마음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종종 가슴이 아프다.
어쨌건 그건 초등학교 때의 일이고 M이 중학굔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무렵부터 우리는 꽤 친했다. 하루종일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길에서 와하하 웃고 다녔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마뜩잖아했다. 거리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들어 공중 도덕의 부재를 꾸짖었고, '모자라 보일 정도로 웃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왠만하면 엄마들은 애들한테 웃고 다니라고 할 텐데, 엄마가 제지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많이 웃고 다녔다. 눈물을 훔치면서 큰소리로 할 말 못 할 말을 발산해댔다.
M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눈물을 찔끔 닦으며 M에게 운동화를 하나 사서 안기곤 멋진 카페를 갔다. 그녀의 입학 전까지 우리는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송도를 놀러 갔다가, 타로를 보러 갔다가, 인사동을 구경했다가... 충동적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M의 대학 입학 후에도 우리는 종종 함께였다. 아니 M이 대학을 간 뒤부터 우리는 거의 매일, 매순간 붙어 다녔다. 서로의 학교 축제 때 부스 구경을 하다가 닭강정을 사먹고 교정을 걸어다녔다. 우리 과의 주점에 친구 몇을 데리고 M이 놀러온 적도 있었다. 술은 따로 마셨지만 둘 다 얼근히 취해 내 좁아터진 자취방에서 같이 잤다.
무수한 글에서도 밝힌 적 있지만 나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대학 생활을 6년 정도 했다. 그 긴 시간의 대부분은 누군가와 어울려서, 혹은 혼자서 끊임 없이 어딘가를 헤집고 다녔다. 나무나 자전거 따윌 핸드폰으로 찰칵,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음미했다. 시간을 음미해대는 대책 없는 음유 시인에게는 늘 어울릴 사람이 필요했다. M에게 오늘은 뭐해, 물어보면 M은 설레는 어조를 감추지 않고 물었다. 왜, 뭐하게.
M은 부르면 곧잘 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M이 대학교에서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없다시피했다. 이런저런 대외활동을 하며 친구를 사귀기도 했지만 결국 엄마가 낳아준 친구, 그러니까 나에게 돌아왔다(?). 웃음코드가 오차 없이 들어맞는 건 서로 뿐이었던 탓이다. 우린 끊임없이 쓸모없는 말을 전방에 발사하고 하하하 웃고 다니다가 말하곤 했다. 엄마가 봤으면 밖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뭐라고 했겠지?
믿을 수 없게 소란스러운
M은 활달하다. 의외로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성격 탓에 친구는 몇 없다만 나보다 훨씬 더 활달한 편이다. M은 맨날 나더러 까다롭다거나 지랄 맞다고 잘도 말한다. 지도 못지 않은 성질머리를 갖고 있으면서. 하하하 웃는 얼굴로 각자의 예민한 기준을 갖고 친구를 사귀어 온 자매는, 이제 친구들의 통합화를 진행하고 있다. 작정하고 너의 이 친구와 저 친구를 알아가겠어, 이런 건 아니었지만 내 친구, 네 친구가 '우리' 친구가 되고 마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MBTI I인 내향형 인간들은 기겁할지도 모를 얘기지만, 우리는 자주 이야기 들었던 서로의 친구를 만나보는 걸 좋아한다. 자매가 하도 붙어다니다 보니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만나본 적도 없는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을 쌓게 된다. 어찌저찌 기회가 닿으면 다 같이 만난다. 처음 만나는 혈육의 친구 앞에서도 우리 자매는 쓸모없는 말을 쉼없이 뱉으며 와하하학 웃는다. 원래 내 친구였는데 걔가 M과 더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일도 생긴다. 심지어 전혀 몰랐던 내 친구의 여러 일화를 M을 통해서 알게 되는 황당한 일도 생긴다. 반대의 일은 잘 안 생기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M보다 더 지랄 맞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군.
M은 시험 공부를 3년째 하고 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극심해 손톱을 뜯어대서 손톱이 거의 없는 지경이 됐다. 스트레스에 풍덩 적셔져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M을 보면서 반성도 감탄도 많이 하지만 그렇게 손톱을 다 뜯어가며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심도 된다. 감정의 고저가 크지 않던 M은 시험 공부를 하면서 조금 기가 죽어 말수가 줄어드는 듯 하여 걱정을 사더니 다시 말이 많아졌다. 오늘은, 언니에게 어그로를 제대로 끌기 위해서 앞으로 미국 유튜버들처럼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를 거라고 말했다. 길다란 손톱으로 삿대질하며 아무말이나 해댈 M을 생각하니 벌써 열 받고 웃긴다.
M은 나와 달리 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어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람과 달리 못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M의 인생 계획엔 남편도 아이도 있다. 아기들은 부모가 말을 걸어주는 정도에 따라 언어 발달 정도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M의 말수를 생각하면 조카의 언어 발달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하게 발달될까 봐 걱정이 되는 편이다. 조카가 만약 나처럼 소리에 민감한 아기라면 M이 말을 걸기 시작하자마자 와앙 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을 텐데,. 불쌍해 우리 미래 조카. 도망치고 싶으면 언제든 이모 집으로 오렴. 나한테 말 걸진 말고 조용히 있으렴.
그러나 조카가 M을 닮는다면? 모녀가 쌍으로 입에 모터를 달고 우리 집에 드나들며 말을 발사해댄다면? 상상만으로 오싹하다. 말이 너무 범람하면 조카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한테 토스해야겠다. 우리 엄마도 소녀처럼 말이 정말 많기 때문에 나는 셋으로부터 재빨리 도망쳐야 하겠다.